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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민 Aug 31. 2022

휴먼브랜드 회고록(15)/웍샵

자기다움(2) -활용 편

질문으로 만들어진 자기다움 




이미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잘못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두 번째 창업, 두 번째 권민


 2007년. 나는 모라비안 바젤 컨설팅을 사임하고 비영리 경영에 대해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싶었다. 지금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개념이 낯설게 들리지 않지만, 2007년 한국에서는 사회적 기업의 정의도 갖추지 못했다. 물론 [비영리 경영]에 대한 지식과 커뮤니티도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다. 참고로 사회적 기업 진흥원은 2010년에 설립되었다.


사회 가치와 정의를 위해 영리를 버리고 헌신한다는 비영리단체에 대한 어설픈 비전으로 공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그 반대다. 내가 알고 경험한 비영리 단체의 모순과 폐단에 관해서 글로 쓴다면 앉은자리에서 A4 50장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비영리 단체의 비리를 보면 영리 단체보다 돈을 더 밝히고 음성적이며 기괴하고 기형적이다. 뉴스에서 가끔 장애인 혹은 유기견 비영리 단체에서 경악스러운 일들이 터지는 것을 종종 접하는 것처럼, 이런 일들이 비영리단체에서 반복적으로 은밀하게 일어난다. 나는 우리나라의 이런 열악한 비영리단체 환경에 필요한 것은 ‘지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비영리 단체의 새로운 기준을 세팅하고 경영 수준을 올리는 비영리 단체를 론칭하거나 돕고 싶었다. 미국은 비영리 경영에 관한 학과가 많았기에 나는 이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알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있는 비영리단체 경영에 대한 마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하고 쿠웨이트 공사현장으로 출장을 가셨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셔서 5학년 때 돌아오셨다. 나는 아버지를 무서워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독자가 상상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쿠웨이트에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며칠이 지나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으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나의 꿈이 무엇일까? 내가 꿈을 꿀 수 있었을까? 나는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빨리 커서 이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다. 그 순간의 감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아버지의 질문 때문에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대답 이후에 갑자기 따귀를 맞은 충격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런 대답을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고아원을 설립할 거예요.”


그러니깐 나는 고아원(지금은 보육원이라고 한다)을 설립하겠다는 꿈을 가지지 않았다. 왜 나는 그렇게 이야기했을까? 그 당시 초등학교 반에는 1~2명의 고아가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꼈고, 그들에게 나의 어려움을 나누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그들이 사는 고아원도 놀러 가면서 친하게 지냈다. 아마도 그때 나는 고아인 친구를 돕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대답이 아마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라고 추론된다. 그리고 그렇게 고아를 돌보는 것이 착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대답과 동시에 눈이 번쩍였고, 깜깜해졌으며 그리고 방바닥으로 튕겨 나갔다. 너무 놀라서 오줌도 지렸던 것 같다. 날아오는 따귀에 대해서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에 충격은 엄청났다. 순간적으로 서러웠고, 무서웠고, 창피했다.


“그딴 것 때문에 내가 쿠웨이트에 간 줄 알아!”


따귀를 맞은 얼굴에는 아버지의 커다란 손자국이 났고 그것은 나중에 멍으로 남았다. 나는 얼굴에 피멍이 들어 바둑이처럼 되었다.

 에스티 유니타스에서 근무하면서 [고아들의 창업을 돕기 위한 교육과정]을 만든 적이 있다. ‘수많은 이유와 방해로’ 중단되었다. 지금은 [세품아]라는 사회단체와 고아와 어려운 환경에 놓은 청소년을 위해서 ‘사회적 입양’이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https://brunch.co.kr/@unitasbrand/394


 내가 비영리단체 경영에 대한 기억의 기원은 바로 이때다. 하지만 이것 때문에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목적, 원인, 이유, 시작, 동기라는 단어로 내가 왜 비영리단체 경영을 하려고 할까를 생각하면 꼭 이 기억 앞으로 오게 된다. 정말 나는 고아원을 운영할 것인가?


 나는 비영리단체라는 조직보다는 목적과 가치로 일하는 조직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 이유는 아직도 찾는 중이다. 내가 창업한 회사에서 스스로 물러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 않은 것은 지금 말하는 휴먼브랜드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임 결정은 한마디로 겉멋이고 나의 선함을 보여주고 쿨하게 보여주려는 잘난 척이기 때문이다. 나의 사임은 위선이고 가식이었다.

 루푸스 사건 이후로 함께 일하는 파트너에 대한 관계도 예전 같지 않았다. 


회고록을 쓰면서 스스로 사임을 결정한 것은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권민 흉내를 내면서 스스로 자신을 속이면서 내렸던 결정에 대해 지금은 후회하고, 창피하고, 역겨울 뿐이다. 내가 나의 따귀를 때린 것 같다.


 모라비안 바젤 사임 이후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바젤 광고 대행사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클라이언트 요청으로서 만들어진 조닉스, EMC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먼저 정리했다.

 바젤은 [역사 속에 나타난 비즈니스 선교]라는 책에 나온 선교회 이름이다. 바젤 선교회는 스위스 바젤 지역의 청교도가 러시아 군인들의 선교를 위해서 만들어진 단체였다. 


광고대행사와 아주 관계없고 의미도 없다. 단지 모라비안 바젤 컨설팅회사의 자회사라는 개념을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도 회사를 정리하기에 앞서서 2명 남은 직원과 회의했다. 회사 통장에 1억 5천만 원 정도의 자금이 있었다.


 당시에 2명 만남은 회사에는 비전도 그리고 광고 대행 오더는 없었다. 우리는 이대로 바젤 회사를 접을 것인가? 아니면 1억 5천만 원으로 뭔가를 해보다가 접을 것인가를 논의했고 결국에는 뭐라고 해보고 접자고 2명의 직원의 의견을 따랐다.



가장 낮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회고록을 쓰기 위해서 2007년으로 다시 와서 바라보니 내 인생의 최악의 선택이 최고의 길을 열어 주었다. 바젤 이야기다. 바젤의 정상화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길을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이다. 바젤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나의 계획은 직원 2명이 하자는 대로 일단 해보는 것이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 끝나는지를 함께 지켜보고 싶었다. 그것이 직원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패션 광고 대행사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바젤의 확실한 차별점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패션 광고 대행사는 직관과 독특한 감각으로 세분화된 광고대행사이다. 그러나 광고 영업 1명, 디자이너 1명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만약에 직원 2명이 일하다가 모두 떠났다면 유니타스 브랜드라는 잡지가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회고록을 쓰기 위해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 현장을 찾아가면 운명(숙명에 가까운 섭리)을 마주칠 때가 있다. 유니타스브랜드라는 잡지를 론칭하기까지 나의 인생의 점들을 맞추어보면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너무 티가 나는 주작처럼 보인다.


2명의 직원이 마지막까지 광고대행사를 운영하고 싶다는 말이 없었다면,

2명 중의 한 명은 바로 떠나고 남은 A가 포기했다면,

40세에 모라비안 바젤 컨설팅을 퇴임하지 않았다면,

루프스라는 오진을 받지 않았다면,

모라비안 바젤 컨설팅을 창업하지 않았다면,

패션인사이트에서 객원 에디터 권민으로 활동하지 않았더라면,

월간) 큐 잡지를 만들지 않았다면,

만약에 낮은 울타리에서 A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1993년도에 두란노 출판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유니타스브랜드 잡지를 론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것이다. 23살에 시작한 혈액형 관리 프로그램과 광고 기획 서적이 14년 뒤에 여기까지 끌고 왔다. 억지스러운 인생 해석이지만 달리 다른 것으로 [유니타스브랜드]를 왜 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다. 나에게 [유니타스브랜드] 잡지는 계획도 상상도 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바젤 광고 대행사를 차별화하기 위한 아이디어로 브로슈어에 사진과 글도 같이 넣어 보자고 했다. 그런데 브로슈어 같은 느낌은 아니라 전문 소책자, 그러니깐 박물관에서 나누어주는 전문 브로슈어 같은 잡지를 만들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1차로 만들어진 책은 50페이지 정도 되는 얇은 책자였다. 당시에도 광고대행사에서 자신의 광고 캠페인을 사보처럼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도 그런 광고대행사의 사보 콘셉트로 만들었다. 주변 반응이 좋았고, 그 반응에 대한 느낌도 좋았다. 우리는 진짜 잡지 같은 바젤 안내서를 만들자고 했다.

 그런데 끝까지 함께 해보자는 직원 2명 중에 한 명이 퇴사했다. 그래서 디자이너 1명과 작업을 시작했다. 이쯤 되니깐 왠지 이번 잡지로 바젤 광고대행사는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 같았다. 큰 기대 없이 우리는 예전에 만들었던 잡지를 만들었다. 안은주 실장은 예전부터 잡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과정에서 그녀의 탁월함으로 잡지는 만들어졌다.


잡지 싱글즈와 포브즈 편집장을 만나서 잡지 론칭 비용에 대해서 조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 20억에서 30억 정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제 1억 얼마 남지 않은 돈을 가지고 잡지를 만들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기왕이면 전문 잡지 같은 프리미엄급으로 만들자는 욕심이 생겼다. 


원래 같이 놀자고 시작했던 게임이 나중에는 목숨 걸고 경쟁하는 승부가 되는 것처럼 A와 나는 상당히 진지해졌다. 나이테가 늘어나면서 나무가 커지는 것처럼 유니타스브랜드 콘텐츠는 나이테처럼 늘어났고 두꺼워지기 시작했다. 유니타스브랜드는 우리의 염려와 기쁨으로 배를 부풀려오는 개구리처럼 계속 커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완성도를 올리기 위해서 정기구독 엽서까지 만들어서 넣었다. 잡지를 론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잡지 한 권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니타스브랜드를 만들었고 출시했다. 바젤 커뮤니케이션에 마지막 한 명으로 남아 있는 A와 함께 최선을 다했다. 나는 한 권의 잡지 발행과 바젤 커뮤니케이션과 인연은 그렇게 끝날 것을 예상하였다. 하지만 유니타스브랜드는 나에게 완전히 다른 삶을 가져왔다. 회사로 [유니타스브랜드] 정기구독 전화가 온 것이다.


 정기구독자는 개인이 아니라 회사들이었다. 대기업 마케팅 부서에서 정기구독 전화가 왔다. 한 번에 100여 개의 기업 정기 구독이 왔다. 그때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는데 주변 반응으로 인해서 없던 사명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스스로 만든 동기부여일 것이다. 돌이켜 보면 유니타스 브랜드 잡지는 사명으로 만든 잡지가 아니라 운명에 의해서 이끌려 만든 잡지였다.


 40세, 권민. 나는 유니타스브랜드 론칭과 함께 또다시 태어났다. 모라비안바젤을 론칭할 때 의도적으로 권민을 앞세운 것처럼 하지 않았다. 유니타스브랜드를 출시하면서 다시 태어나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다. 이때와 시간 그리고 사건은 말 그대로 ‘운명’이었다.


이것 또한 돌이켜보니 나의 인생과 인격은 모두 2007~2008년에 의해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내가 40세 이전에 만난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러니깐 내가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기억하는 20세부터 40세까지 나의 사고방식과 태도는 엉망이었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서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그리고 나와 함께 유니타스브랜드를 만들었던 모든 직원에게도 용서를 구하고 싶다. 잡지 운영에 대해서 그 어떤 지식도 없었고, 전문지 창간과 운영에 관한 경험도 없이 유니타스브랜드를 창간했다. 나와 일했던 모든 에디터와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잡지 경력이 없는 사람이며, 이곳이 첫 직장인 사람이었다. 그들도 초보였고 나도 초보였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서 최고 경험이 유니타스브랜드 잡지였지만,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글을 쓰면서 이빨이 빠졌다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브랜드 내용을 만화로 만든 유니타스브랜드 볼륨 30호를 내었을 때 3개의 이빨이 빠졌다. 그렇다고 이렇게 열심히 잡지를 만들어서 돈을 번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컨설팅을 해서 그 돈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유니타스브랜드가 2016년에 합병 되었을 때 기업 매출 실사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컨설팅으로 87억을 벌어서 그 돈을 모두 유니타스브랜드를 만든 것이다. 그렇다고 유니타스 브랜드가 나에게 애증의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니타스브랜드는 나에게는 인생의 스승이고 인생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모라비안 바젤의 권민 그리고 유니타스브랜드의 권민 

이 두 명은 다른 사람이다. 모라비안 바젤의 대표이사였던 권민은 [새벽 나라에 사는 거인]이라는 책에 나왔던 인물을 흉내 낸 사람이다. 

 배우가 메서드 연기법에 취해서 촬영이 끝났는데 등장인물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모라비안 바젤의 권민은 자신이 쓴 [새벽 나라에 사는 거인]에 취해서 현실감이 떨어졌다. 


굳이 이런 것들을 열거하지 않겠지만 그중에 가장 창피한 것을 꼽으라고 한다면 사임이다. 나는 내가 쓴 소설의 주인공인 새벽 나라에 사는 거인처럼 폼을 잡고 싶었다. 


  그렇다면 유니타스브랜드의 권민은 누구일까?


앞으로 휴먼브랜드 교육시간에 자세히 나누겠지만 이번에 세팅되는 [권민]은 완전히 달랐다. 

“최고의 편집장은 어떤 능력이 있어야 하는가?”

“브랜드 편집장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전문 잡지 편집장은 어떤 습관이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자기다움으로 편집장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되고 싶은 권민은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를 찾았다. 

나는 내가 되고 싶었다. 





휴먼브랜드 휠



지금 보고 있는 키워드는 회고록을 작성하면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 헤시 태그를 붙여서 모은 것들이다. 

휴먼브랜드 휠은 내가 어떻게 무엇에 어느 정도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서 도식화한 그림이다.

MBTI로 그 중에 한 명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유형이며 밖으로 드러난 DNA라고 할 수 있다. 


휴먼브랜드 휠의 알고리즘을 통해서 내가 무엇을 선택할 것이고, 결과물은 어떻게 나올 것이며 그리고 나는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를 알려준다.


내가 고아원을 세우고 싶은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바로 영적이며 모범이 되고 내가 받고 싶은 섬김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준비하고 있는 비영리단체의 사회적 브랜드도 [섬김] 영역에서 출발하여 [영향력]과 [창조]에서 나온 것이다. 


휴먼브랜드 브랜드 휠은 휴먼브랜드 교육과정의 결과물이다. 

이것은 나의 지도이며 나의 자기다움이다. 

수 년동안 회고록을 쓰면서 비로서 알게 된 나의 실체이다. 

이것을 만드는 휴먼 브랜드 휠은 대면 웍샵 시간에 자세히 소개하겠다.



https://brunch.co.kr/@unitasbrand/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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