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장. (4) 존재와 시간

by 송영채

20년 전에 생산된 로봇이라 그런지 사서 로봇과 대화하는 것은 다른 로봇들과의 대화와는 조금 달랐다. 사서 로봇은 소년의 말에 ‘공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서 로봇은 소년이 원하는 것이 무언인지 파악하려고 애썼고,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서 노력하는 것 같았다.


사서 로봇은 소년에게 도서관이 어떤 곳이었는지, 책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야기 해주었다.

그리고 소년은 사서 로봇으로부터 그 책들을 쓰고, 읽고, 모으고, 돌려보던 옛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서 로봇의 시선은, 마치 먼 기억을 더듬는 듯 조용히 허공을 향하는 듯 했다.



사서 로봇이 관찰했던 도서관의 사람들 중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찾아 하루 종일 읽는 사람들도 있었고,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구절이 나오면 책장의 모서리를 접거나 책갈피를 꽂아두던 이들도 있었다. 소년은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듯 사서 로봇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소년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책장 모서리를 접는 이유를 떠올려 보곤 했다. 사서 로봇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소년은 자꾸 상상을 하게 되었다.


오늘도 무단조퇴 후에 들른 도서관에서 소년은 사서 로봇을 찾았다. 예전 도서관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듣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던 기억 때문이었을까. 소년은 옛날 이야기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처럼 사서로봇을 보챘다.


“그때 기억난댔지? 도서관에 사람들이 북적이던 때 말이야.

근데… 그때 너는 무슨 일을 했어?”


“저는 기본적으로, 반납된 책을 분류하고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책을 대여하거나 반납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고, 책을 찾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서 로봇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사람들에게 책을 추천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책을 추천했다고? 어떻게 추천했는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지식을 알고 싶어 하며, 어떤 자극을 바라는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의 목록과 내용을 비교해서 그 사람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을 추천했지요.

제가 추천한 책을 사람들은 종종 좋아해 주었습니다.”


사서 로봇의 말을 들은 소년이 살짝 망설이듯 말했다.


“그래? 그럼… 나한테도 책 한 권 추천해 줄래? 나… 사실, 이렇게 생긴 책은 읽어본 적이 없어.”


“네. 그럼 지금까지 당신과 나눈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책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사서 로봇의 눈에서 반짝이는 민트빛이 한층 더 밝아졌다. 소년은 숨을 죽이고 깜박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로봇은 의미심장한 비밀을 나누듯 말했다.


“당신에게…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추천합니다.”


소년은 눈을 껌뻑이며 물었다.

“뭐라고? …존재와 시간? 제목부터 너무 어려운데?

내가 읽을 수 있는 책 맞아? 나 글자도 겨우 읽는다고…”


로봇의 눈이 다시 깜박였다.

“죄송합니다. 당신의 문해력 수준을 고려하여

좀 더 쉬운 책으로 다시 검색하겠습니다.”


소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됐어. 자존심 상하게…”


그리고 잠시 후, 소년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존재라 그랬니? 존재가 뭐야?”


“존재란 ‘있음’—또는 ‘있는 것’을 뜻합니다.

철학에서는 사물이나 개념 따위가 실재로 존재함을 가리킵니다.

이때의 존재는 단순히 ‘여기 있다’는 의미 이상을 내포합니다.”


소년은 로봇의 말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말 안엔, 마치 커다란 호수가 조용히 차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있음인데 있음 이상이라고...? 그게 뭐야…”


작게 중얼거리던 소년이 다짐하듯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한번 찾아나 보자.

처음으로 추천받은 책인데… 읽지는 못해도, 열어볼 수는 있잖아?”


[193 Hei b]...


사서 로봇에 내장된 서고 정보에 따라서 소년과 사서로봇은 추천책을 찾아 도서관을 뒤지기 시작했다.


193번 ‘철학’이라 표시된 책장에서 소년은 마침내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짙은 갈색 표지 위에, 《존재와 시간 — 마르틴 하이데거 저》 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는 오래된 책이었다.



소년은 표지를 열고, 한 장을 넘겼다.

작은 글자들이 어지럽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문장이 조용히 누워 소년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Wir sind heute ratlos und wissen nicht mehr, was ‘Sein’ überhaupt heißen soll.

우리는 오늘날, '존재'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Das Sein selbst ist das, was am meisten vergessen wird.

존재 그 자체가 가장 많이 망각되어온 것이다.


소년은 눈을 찡그리고 글자를 더듬더듬 읽다가, 결국 고개를 들어 사서 로봇을 쳐다보았다.


“너 말대로 책 다시 찾아봐야겠다. 이거 하나도 이해가 안 돼…”

소년은 민망함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로봇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죄송합니다. 재검색 중…”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그 순간 사서 로봇도 왠지 소년과 함께 미소짓고 있는 것 같았다.

로봇과 대화하며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keyword
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