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도서관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터질 듯 고요했다. 소년은 손목에 찬 모바일 워치의 희미한 조명기능에 의지해 휴면 상태로 충전 중인 사서 로봇를 찾아갔다. 소년의 인기척을 느낀 사서 로봇이 민트색 눈을 뜨고 말했다.
“현재 시각, 오전 12시 24분. 지금은 청소년이 혼자 집 밖을 나갈 수 없는 시간입니다.”
로봇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울렸다.
소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응, 알아. 그런데… 나 너무 급한 일이 생겼어. 지금 바로 이걸 찾아내지 않으면, 정말 못 견딜 것 같아서 왔어. 도와줄 사람, 아니… 도와줄 로봇은 너밖에 없잖아.”
사서 로봇의 민트빛 눈동자가 잠시 깜빡였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소년은 품에서 책을 꺼내 17페이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너가 추천해준 그 책… 그걸 읽다가, 여기서 뭔가 이상한 걸 발견했어. 봐. 이 부분.”
소년이 책장을 사서로봇의 카메라 앞에 내밀었다. 로봇이 눈을 반짝이다가 멈추고 말했다.
“어두워서 식별이 불가능합니다. 비상 발광모드로 전환합니다.”
이윽고 로봇의 눈과 귀에서 더 밝은 빛이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소년의 손 위에 펼쳐진 책장이 은은한 빛에 물들었다.
“존재란 가장 많이 잊혀져 온 것이다.”
로봇이 책의 활자를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로봇의 소리를 듣던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거 말고… 그 밑에, 누가 손글씨로 써놓은 거 있잖아. X 박사라는 사람이 쓴 거.”
“네, 찾았습니다. 존재란 그저 살아있음이 아니라…”
“맞아, 그거야. 내가 계속 찾던 단어가 거기 있었어.
오래 전에 누군가가 그랬거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남겨진 사람이 피해를 본다며, 차라리 그냥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리고 싶다고…
그 말을, 내가 아주 어릴 때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아.”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로봇의 질문에 소년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응… 우리 엄마.”
“그래서 ‘증발’이 뭐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깜짝 놀랐어. 내가 그 말을 알아들을 줄은 몰랐던 것 같았지. 그때 내가… 한 다섯 살이나 여섯 살 쯤이었던거 같아.”
소년은 숨을 작게 한번 가다듬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다시 물으니까, 엄마는 그저 좋은 거라고만 했어. 나중에 크면 알려주겠다고 얼버무리셨지. 사실 엄마와의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데, ‘증발’에 관한 그 장면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어.
엄마가 그렇게 좋은 거라고 했으니, 정말 좋은 건가 보다 싶어서, 애써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생각나. 그 뒤로는 희미해졌다가, 방금 네가 그 문장을 읽어준 순간, 불쑥, 그때 기억이 다시 떠올랐어. 아마도 무의식 깊은 곳에서 계속 기억하고 있었나 봐.”
소년과 로봇은 잠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증발이라는 말… 정확히 무슨 뜻이야?”
정적을 깬 소년의 질문에 로봇이 대답했다.
“제가 보유한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증발’의 첫 번째 의미는 액체 상태의 물질이 표면에서 기체 상태로 변하는 현상입니다. 두 번째로, 사람이나 물건이 갑자기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는 현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머니께서 쓰신 ‘증발’이라는 단어는 두 번째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X 박사가 돕겠다는 그 증발도, 같은 뜻일까?”
“그런 것으로 판단됩니다.”
소년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고요가 잠시 도서관을 가득 메웠다.
이윽고 소년은 다시 책을 넘기며, 사서로봇을 바라봤다.
“박사 이름 뒤에 적힌 저 알파벳과 숫자… 그건 무슨 뜻이야?”
로봇의 눈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네, 찾았습니다.
그것은 지구의 위치를 나타내는 경도와 위도 정보입니다.”
“경도, 위도? 그게 뭐야?”
“지구상의 특정 지점을 숫자로 표시하는 방식입니다.”
사서 로봇은 자신 가슴에 있는 화면을 켠 후 동그란 그림을 하나 띄웠다. 군데군데 고장난 스크린은 조각을 잃은 퍼즐처럼 군데군데가 비어있었다.
“여기 오렌지가 있습니다.
오렌지를 좌우로 가로로 자른 선들 — 이게 위도입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자른 선들 — 그게 경도입니다.”
소년은 화면 속에서 빛나는 주황색 동그라미를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위도는 북쪽이나 남쪽으로 얼마나 올라가거나 내려갔는지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경도는 동쪽이나 서쪽으로 얼마나 이동했는지를 표시하지요.”
소년이 다시 묻는다.
“그럼 박사 이름 옆에 적힌 이 숫자들도… 해석할 수 있어?”
로봇이 짧은 침묵 끝에 대답했다.
“네. 적도에서 북쪽으로 약 37.5도,
그리고 그리니치에서 동쪽으로 약 126.95도 떨어진 지점 —
국가중심구 외곽의 강변 지역으로 검색됩니다.”
소년은 화면에 떠오른 희미한 좌표를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이 숫자를 따라가면… X박사가 있는 곳에 갈 수 있다는 거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 대한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년은 조용히, 하지만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정적 속에서, 자신 앞에 놓인 길이 단 하나뿐임을 소년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