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주의 마음기록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째서 행복을 첫 번째 목표로 삼지 않는 걸까? 왜 이런 부차적인 수단들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우리가 부차적인 수단들 대신 첫 번째 목표로 곧장 행복을 설정하면, 그러면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들을 더 쉽게 얻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 디팩 초프라 [우주 리듬을 타라] P15 中’-
돈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기면서 나는 돈공부를 시작했고, 자기 계발을 하며 생각을 바꾸는 연습을 하다 좌절하기도 했었다. 그 과정 속에서 생각보다 마음이 먼저라는 것을 깨닫게 된 ‘마음공부’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 연재에 썼다. 돈공부를 하며 나는 돈이 주는 자유, 그 대단한 배당금을 알게 되었고, 그 자유가 나에게 가져다줄 것이 무엇일지 끝없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돈이 주는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들에는 퇴사하기, 부모님과 여행하기, 여유롭게 책 읽기, 가족과 친구들에게 선물하기, 친구들과 실컷 놀기 등이 있었다. 또한 늘 멍플릭스만 보고 있는 아지를 위해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 갈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넓은 방 한 칸을 냥이를 위한 공간으로 꾸미고 싶은 바람도 있었으며, 유기견이나 길냥이를 돌보는 곳에 많은 후원을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것들은 하고 싶은 걸까? 그것들이 이루어질 때 나는 어떤 기분이 들까.
왜 부모님과 여행을 하고 싶을까? 부모님을 사랑하니까,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부모님과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풍경을 보고 새로운 음식을 함께 맛보는 것, 그 시간 자체가 행복으로 느껴질 것 같았다.
유기견이나 길냥이를 돌보는 곳에 후원하고 싶은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거창한 이유라기보다는, 나는 그저 동물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특히 구조하여 입양하게 된 아지와 스트릿 출신 냥이를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곳에 마음이 쓰였다. 아이들이 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학대나 유기의 소식을 보고 듣는 것보다는, 돌봄과 보호 속에서 아이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들이 편안할 때 나도 기뻤고 행복했다. 그리고 내가 그 행복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더없이 좋았을 뿐이다.
이처럼 모든 질문의 끝에는 언제나 ‘행복’이 있었다. 사랑해서 행복하고, 목표를 이루어 행복하고, 나눌 수 있어 행복하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어서 행복할 것 같았다. 모건 하우절이 얘기한 ‘돈이 주는 배당금’도 결국은 행복과 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과 함께, 원하는 만큼 할 수 있는 능력’이 주는 진짜 가치 역시, 가족과 나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아닐까. 우리가 어떤 좋은 물건을 가지길 원한다고 했을 때, 그 물건을 가지려는 이유도 ‘왜’라는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궁극적으로 그 물건이 우리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 아닐까.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은 나의 행복, 그리고 가족의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나의 행복으로 돌아온다. 가족이 행복하면 내가 행복하니까. 그래서 나는 웨인 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20년 만에 다시 읽으며, ‘자신의 행복을 가장 먼저 바라보고 자신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언제 행복한가, 가장 사랑해야 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이어가면서 마음공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시 행복이라는 화두로 돌아오면, 나는 이 과정들을 거쳐 ‘행복’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하면 행복할까, 무엇을 가지면 행복할까, 무엇을 얻으면 행복할까? 나는 최우선적으로 나의 마음이 행복하길 원했고 그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렇다면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또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치열해지고 있었다. 마치 그 모든 것을 이루어야만 행복할 것처럼 생각했다.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여전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행복에 이르는 길은 멀고도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삶은 늘 내 편이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헤매던 나에게 삶은 다시 길을 알려주었다. 몇 번의 우연을 거쳐 발견한 한 책에서 나는 다음 글귀를 만났다.
“이처럼 우리는 꿈이 이루어진 바로 그 순간에조차 더 크고 높은 목적을 향한 욕심과 집착 때문에 이미 찾아온 행복을 스스로 걷어차버리곤 한다.
행복은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 추구는 죽을 때까지 끝없이 계속되지만 누리고 만끽하는 것은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다. 누릴 수 있는 것을 걷어차면서 어떻게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하는가. … 삶이란 추구해야 할 무엇이 아니라 누리고 만끽해야 할 무엇이다. 주어진 삶을 누릴 때 비로소 삶의 완전성이 드러난다. 본래부터 완벽했고, 완전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P76.)”
“삶은 언제나 완전하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 (P81)“
- 법상 스님, [날마다 해피엔딩] 中 –
행복을 열심히 ‘추구’하고 있는 나에게, 행복하기 위해 애쓰는 나에게,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우연히 접한 책의 한 구절이 행복은 이미 여기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시끄러운 생각들을 걷어내고 행복이 마음을 가득 채운 순간이었다.
삶을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이, 나로 산다는 것이 이렇게 쉽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나는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온 마음으로 이 구절을 받아들였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단 한순간도 완벽할 수 없기에, 나는 행복을 미루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행복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어렵고 먼 일이라고만 생각하면서 행복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 지금 이 순간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저녁 엄마가 전화를 받으실 때 신난 목소리로 “네~~”하고 전화를 받을 때, 한참 이야기하다 “우주만큼 사랑해”라고 말하고 “오늘은 내가 먼저 했다!”라며 웃으실 때 나는 나는 행복하다. 부모님 댁에 갔다가 집에 올라올 때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아빠가 ‘조심해라’라고 하며 더 이상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계시는 걸 백미러로 볼 때 나는 행복하다.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산책길에 아지가 내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아 간식을 기다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못 이긴 듯 간식을 건네면 조심스레 손에 닿지 않게 간식을 받아 욤뇸뇸뇸하고 꼭꼭 씹어 먹고는, 간식을 더 달라고 앞발을 하찮게 살짝 들다 말거나, 나를 다시 빤히 쳐다볼 때면 나는 행복하다. 봄을 앞둔 어느 날 아지와 산책을 하며 힘차게 올라오는 새싹들과 피어나려는 꽃봉오리들을 보거나, 여름을 앞두고 각자의 색으로 초록색을 뽐내는 나무들을 보거나, 화려하게 물들기 시작하는 단풍을 보거나, 눈꽃으로 뒤덮인 겨울의 나무들을 보면서 온몸으로 계절들을 느낄 때 나는 행복하다.
밤에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냥이가 폴짝 침대 위로 올라와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한참 꾹꾹이를 하다가 머리를 기대고 잠들 때, 새벽녘에 일어나도 여전히 내 옆에 기대어 자고 있는 냥이의 복실한 털을 쓰다듬을 때 나는 행복하다.
친정 같은 친구가 “반찬 가지러 와”라고 불러 가보면, 식탁 가득 반찬을 해 놓고 “아침부터 반찬 공장 돌렸어”라며 온갖 찌개와 반찬, 군것질거리들을 크고 탄탄한 가방에 꾹꾹 담아줄 때 나는 행복하다. 친구의 된장찌개와 진미채와 멸치볶음과 장조림과 열무김치로 한 상 차려 두고 밥을 먹을 때 나는 행복하다.
여전히 생각이 많은 나에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해”, “일만 하지 말고 놀아”라며 가끔씩 다운되는 나를, 티 나지 않게 배려해 주며 일으켜 세워주는 친구를 만날 때 나는 행복하다. 나의 첫 제품을 사 주며 빳빳한 새 돈을 봉투에 담아 응원과 사랑의 메모를 적어 슬쩍 건네줄 때 나는 행복하다.
잘 될 거라며, 잘 됐으면 좋겠다며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와 나의 브랜드를 홍보해 주고, 만날 때마다 커피도 사주고 빵도 사주며 나를 응원해 주다가 때때로 카톡이 아닌 전화로 나의 안부를 물어주는 친구와 깔깔거리며 통화할 때 나는 행복하다.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마무리로 다니던 요가 센터를 그만두면서 인연을 맺은 요가 도반들이 서로의 성장을 응원하고, 격려해 주고, 작은 선물들을 준비해 마음을 나눌 때 나는 그 안에 함께 함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삶이 내게 준 복을 헤아려보면, 지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고, 내가 행복한 이유는 언제나, 이미 차고 넘쳤다.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고 배려받고 함께 살아가는 이 모든 인연 속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행복은 오랜 시간을 들여 힘겹게 올라가야만 하는 산의 정상이 아니라 정상으로 향하는 그 모든 길과 모든 시간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기도 했고 뜨거운 햇볕을 막아 주는 나무가 곧 행복이었다. 신발 너머로 전해지는 땅의 온기이자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였고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과 그 순간순간의 경험들이 모두 행복이었다. 행복은 나를 둘러싼 공기였고, 그 공기 속에서 숨 쉬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삶을 살아가는 이 순간의 내가 곧 행복이었다. 나는 그저 이 삶과 나 자신을 온전히 누리면 되는 것이었다.
행복은 거창한 순간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햇빛 좋은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 사랑하는 사람의 짧은 안부 인사, 반려동물의 따뜻한 체온, 계절이 바뀌는 공기 속 작은 변화들.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 모여, 이미 모든 순간 나는 행복했다.
행복은 언젠가 도착해야 할 ‘어디’가 아니라, 지금 내 발아래 이어져 있는 ‘길’이었다.
오늘의 걸음, 오늘의 숨, 오늘의 내가 곧 행복이었다.
그러니, 부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