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은 그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기도이다

하우주의 마음기록

by 하우주
“걱정은 그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기도이다”
- 존 아사라프 -


“아빠가 오늘 일하러 못 가셨어”

“왜?”

“어지러우시대, 아침에 넘어지셔서 팔꿈치에 피가 났어”

2주 전, 조금은 걱정스러운 듯, 또 조금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전화로 아빠의 소식을 전하는 엄마와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대충 짐을 챙겨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그냥 두면 또 괜찮아졌다면서 병원에 안 가실 것 같아, 병원 점심시간 전에 도착할 요량으로 서둘러 220km를 달려 부모님 댁에 도착했다. 바로 병원으로 가자는 나의 전화에 부모님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병원에서 피검사를 하고 의사 선생님은 우선 당뇨로 인한 어지럼증으로 약을 처방해 주셨다. 이왕 나온 거 밖에서 점심이나 먹고 들어가자며, 시원한 냉면을 한 그릇씩 먹고, 망고빙수가 맛있다는 카페에 들렀다. 아빠는 커피를, 엄마와 나는 빙수를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늘 ‘괜찮다’고 하시며 건강을 자랑하던 아빠는, 이번에는 조금 걱정은 되시는지 평소 즐겨 드시던 맥심커피를 다음 날 아침까지 드시지 않으셨다. 엄마는 “당신이 건강해야 나를 돌봐주지”라고 농담반 진담반 말을 건넸지만, 아빠의 얼굴에는 근심이 살짝 드리워진 듯했다.


며칠 후 병원에서는 피검사 결과 빈혈이 의심된다며 추가 검사를 했다. 내부 출혈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배변 검사도 필요하다고 했다. 또 한 주가 지나자, 병원에서는 “추가 검사 결과 단순한 빈혈이 아닌 것 같다”며 큰 병원의 혈액종양내과를 권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의 종합병원들에 전화를 걸었다. 두 곳은 여전히 전공의가 복귀하지 않아 초진 예약을 안 받는다고 했고, 한 곳은 내년 1월이나 돼야 돼야 예약이 가능했다.

‘누구는 당일 입원도 되더니.. 정말 아픈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는 거야’

속으로 욕하며 도내 종합병원들에 다시 전화를 했다. 다행히 도내 병원은 일주일 후 예약이 가능했다. 병원에서 챙겨 오라는 서류들을 확인하고 예약을 마치고, 출근 일정까지 조율하고 나니 큰일이 지나간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그제야 스멀스멀 걱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단순 빈혈이 아니라면? 왜 하필 혈액종양내과라고 했을까? 이후로는 어지럼증은 없다고 하셨는데 겉으로만 괜찮아 보이시는 건가? 걱정인형은 어느새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고 자리를 잡았다.


ChatGPT를 열어 물었다. 골수 문제일 수도 있고, 혈액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고, 진폐의 합병증 가능성도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골수암일 수도 있고, 혈액암일 수도 있고, 폐암일 수도 있다는 건가’

답변을 읽으며 여러 가지 걱정을 시작하던 찰나에, ChatGPT는 ‘정확한 진단을 기다리라’라는 말을 덧붙였다. 마치 걱정을 시작할 나를 알고 있다는 듯.. 그리고 그 기다리라’는 말에 나는 다짐했다. 걱정하지 말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를 지금 당겨와 괴로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고, 미리 추측하고 미리 걱정하며 나를 괴롭힐 필요도 없었다. 제멋대로 튀어 오르는 생각들을 잠시 멈추며, ‘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다’라는 현실을 직시했다.


퇴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으셨다, 아빠도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잠시 후 다시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두 분 다 받지 않으셨다.

“이 뜨거운 날씨에 어디서 뭘 하시는 거야…”

중얼거리며 통화를 포기하고 법상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불안하던 마음이, 날뛰는 생각들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 같았다.

집에 거의 도착해서야 엄마와 통화가 연결됐다. 두 분이서 텃밭 감자를 캐고 계셨다며, 집에 오면 가져가라고 하셨다.

“엄마, 다음 주 월요일에 갈게, 오후에 OO 병원 예약했어”

“거길 왜 가?”

“아빠 큰 병원 가 보라던데, 아빠한테 얘기 못 들었어?”

“못 들었는데… 큰 병원 가 보래?”

“응… 왜 그런지 알아야 해서 검사를 더 해야 하려나 봐,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돼.”

말할 타이밍을 놓치신 걸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걸까, 걱정인형 그 자체인 엄마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말씀을 안 하신 걸까. 아빠를 바꿔 달라 했다.

“아빠, 엄마한테 큰 병원 가봐야 한다는 얘기 안 하셨어?”

“응.. 뭐.. 안 했지..”

“알았어, 검사 더 해야 해서 그런 것 같으니까 아빠 미리 걱정하시지 마”

햇빛 뜨거울 때 조심하시라고, 저녁 잘 챙겨 드시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빠는 늘 그러셨듯 큰 동요 없이 덤덤하신 듯했다.

그날 밤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마음(心力)을 많이 쓴 날은 평소보다 갑절은 더 피곤했다.


다음 날 아침 늘 비슷한 시간,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벌써 텃밭에 다녀오셨다는 엄마는 오이가 주렁주렁 달렸다고 자랑을 하셨다.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일찍 갈게, 아침에 검사 결과 듣고 오후에 OO병원 가야 하니까”

“OO병원에 왜 가?”

“엄마.. 아빠, 어지러운 거 큰 병원 가 봐야 한다고 내가 어제 얘기했잖아. 기억 안 나?”

“… 기억 안 나..”

순간 당황했다가 오늘 치매센터에 가시는 날이니 잘 다녀오시라고 했다.

“응 학교 가야지~ 가면 재밌어~”

다시 밝아진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래, 기억하고 괜히 걱정하시는 것보다 기억 안 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문득 지난번 집에 갔을 때 아빠가 사다 주신 로또 생각이 났다. 지갑에서 찾아 QR을 찍어보니 어랏! 오만 원이 당첨이 된 것이 아닌가!

“이게 웬일이야 흐흐흐” 하며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지난번에 나 사준 로또 5만 원 당첨됐어! 다음 주에 가서 맛난 거 사드릴게!”

아빠는 허허허 웃으셨고 나는 깔깔깔 웃었다. ‘큰 병원을 가보라’는 염라대왕의 심판 같은 말에도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이어지는 삶 속에서, 불쑥불쑥 끼어드는 걱정들을 바라본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도 아빠도, 그 누구도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에도 바다 위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걱정이라는 파도는 잔잔한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생각은 걱정이라는 파도를 키우고 또 키워 거대하게 만들고, 나도 모르게 그 파도에 휩쓸리기도 한다.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어떡하지, 그 일이 일어나면 어쩌지.. 그 수많은 걱정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을까 두려운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 마음의 근원을 또 파고 들어가 보면 역설적이게도 내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진다. 아빠가 걱정되는 이유는 아빠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소중한 아빠를 잃을까 두려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존 아사라프는 말했다. ‘걱정은 그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기도다’. 걱정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붙들고 몸과 마음을 소모할 때 평온함이 찾아올 리 없다. 일, 관계, 생활 모두가 흐트러지고 꼬이기 쉽다. 부정적인 마음으로는 긍정적인 삶을 맞이할 수 없다. 걱정했던 그 일이 아니더라도, 날 선 마음은 끝내 불편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만다.


걱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말고 파도 위를 서핑하자.

어떤 두려움 때문에 걱정하고 있는지, 그 안에서 내가 바라고 있는 건 무엇인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를 찾아보듯 파도의 너울을 지켜보다 파도와 하나가 되어 서핑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잠잠한 바다 위를 일렁거려 파도를 만들고, 작은 파도를 큰 파도로 만드는 것도 나고, 그 파도에 휩쓸리는 것도 나고, 파도 위를 서핑하는 것도 나다. 늘 잠잠한 바다처럼 살 자신은 없으니 삶이란 파도 위에 서핑보드를 올려보기로 한다. 모든 파도를 즐길 순 없지만, 최소한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거리진 말아야겠다. 운이 좋다면 파도 위에서 서퍼가 순간의 자유를 만끽하듯, 나 역시 마음이라는 바다와 하나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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