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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주 Apr 22. 2024

집사의 기록 6

마음이 다친 반려견과 살아간다는 건..

아지는 잘 뛰고 훌쩍훌쩍 잘 넘는다. 산책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하루종일 창밖만 바라보거나 잠을 자는 것 같은 조용하고 얌전한 녀석을 애견놀이터에 데리고 가면, 우사인 볼트 저리 가라 엄청난 속도로 운동장을 뛴다. 운동장을 자주 갈 때는, 애견 놀이터에서 잘 뛰는 아이로 나름 인싸였다. 좀 큰 품종의 그레이하운드와도 비슷하리만큼 잘 뛰는 녀석이다. 코로나 시기를 지나고 집사가 시간이 부족해지면서 놀이터를 거의 못 가지만 여전히 산책 중 만나는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곤 한다.


그러던 녀석이, 어제는 방심했는지 너무 멀리서 뛰는 바람에 자주 뛰어넘는 산책길의 철봉 같은 구조물에 걸려 무릎을 부딪히고 말았다. 부딪혀서 콩~ 하는 소리가 났는데 부딪힌 오른쪽 뒷다리만 들고 있을 뿐 '깨갱', '낑' 등의 다른 강아지들이 내는 신음소리 한 번을 내지 않는다. 부러지거나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이 탁자에 무릎을 부딪히거나 박았을 때와 같은 통증이 있었던 것 같다. 조용히 무릎을 굽혀 들고 있는 녀석의 다리를 한참을 부드럽게 만져주었는데도 아픈 건지, 무서운 건지 다시 걷기를 힘들어하길래 20킬로가 넘는 녀석을 안고 20미터 정도를 걸어왔더니 중간에 내려달라고 한다. 찡~ 하고 아플 통증이 어느 정도는 가신 건지 다시 걷기 시작했다. 걷는 모양을 계속 지켜보며 집으로 와 만져주고 안아주고는 아침에 다시 보니 이젠 완전히 괜찮아졌는지 냥이와 후다닥 뛰기도 했다. 다행이었다.




다리를 부딪혀 아픈 것도 안쓰러웠지만, 소리 한 번 안 내고 내색 한 번 안 하는 게 더 안쓰럽다. 감정 표현이 서툰 아이.. 뭘 바라지도 않고 잘 요구하지도 않고 자신의 감정을 잘 내색하지 않는 아이.. 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키우던 주인과 아이들에게 매일 맞으며 학대를 당하던 아이였다. 1살이 채 안 된 것으로 추정될 무렵, 지역에서 구조하는 분들이 학대하는 주인에게 5만 원을 주고 구조하여 여러 임시보호집을 전전했다고 했다. 구조된 아지는 피부병이 있어 털도 다 밀어야 했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지 덩치도 크지 않았다. 9킬로 정도, 구조한 분들은 아지가 다 컸다고, 집안에서 키우기 좋을 거라 했다 ㅎㅎ 예쁜 강아지는 아니었고, 털도 다 밀고 말라서 볼품없었다. 더구나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 믹스견은 입양이 쉽지 않다 했다. 임시보호도 이젠 어렵다 했다. 겁먹은 눈망울에 깊은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언젠가는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것이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유튜브로 남의 강아지들을 보며 아쉬움을 달랠 뿐이었는데.. 털을 다 민 채, 중성화 수술을 하고 캡모자를 쓰고 있는 녀석이 또 어딘가 임시보호를 전전해야 할 생각을 하니 안쓰럽기만 했다. 결국 그렇게 아지를 데려왔다.  


가족으로 맞아 데리고 살다 보니 한 달에 1kg씩 살이 찌다가 18kg쯤에서 멈췄다. 데리고 온 지 일 년 만에 거의 두 배가 더 컸다 ㅎㅎ 털이 빠지지 않을 거라 했지만 겨울털로 지내는 2개월 정도를 제외하곤 일 년 내내 털갈이를 하는 듯하다. 외모는 예뻐졌다. 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 중에 잘생겼다, 이쁘게 생겼다는 말을 듣는다. 깊은 눈망울만 그대로, 처음 왔을 때 선명하던 분홍코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까만 점이 생기고 있다. 냥이 남동생이 생긴 이후로 식탐이 많아져 2kg 정도가 더 쪘다.




외모는 변했는데 아지는 학대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한지 아이들을 무서워한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부터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까지. 아이들을 보면 조용한 아지가 짖는다. 아이들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거나 뛰면 더 크게 짖는다. 낯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싶지만 여전히 두려운 듯하다. 머리를 만지려고 하면 깜짝깜짝 놀란다. 큰 소리에도, 갑작스러운 움직임에도 아지는 여전히 겁을 먹고 화들짝 놀란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는 아지를 보면 예뻐해 주는 분들께 민망스럽기도 하고, 내가 충분히 사랑을 주지 않아서일까 자책하기도 한다.


아지를 키우며 여러 감정들을 경험하지만, 가장 마음이 아픈 순간은 어제처럼 아픈데도 내색하지 않는 걸 볼 때이다. 학대의 상처와 때론 환영받지 못한 임시보호를 전전하며 겪었을 눈칫밥과, 영문모를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이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과정들 속에서 지금까지도 이 아이는 감정을 숨기고, 바라지도 요구하지도 않고, 또다시 버림받는 건 아닐까 하며 눈치를 보며 사는 건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예민하고 소심한 아이였던 걸까.. 해맑기만 하던 냥이 동생이 집에 들어온 이후 사고(?)를 치면 컹컹 짖으며 나에게 이르기도 하고, 냥이를 저지하기도 하는 건 어떤 마음일까. 집사인 나를 위함일까, '너 그러다 쫓겨나'하며 냥동생을 걱정하는 걸까.




감히, 자식들을 키우는 부모 마음만 하겠냐만은.. 아지와 냥이를 키우며 나는 때론 부모님을 떠올리고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간다. 어릴 때 학대받은 기억으로 인해 여전히 힘든 아지를 보며, 과거의 상처받은 마음으로 인해 현재의 시간에 아파하고 그 상처를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꽁꽁 싸매거나 혹은 자신도 모르게 타인에게 비슷한 상처를 주기도 하고, 그렇게 인지하지도 못하고 아물지도 못한 상처로 여전히 아플 누군가의 미래를 본다. 그래서 상처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치유하지 않은 상처는 지금 현재의 나에게도, 미래의 나에게도 여전히 영향을 주고 영향을 줄 것이다.

'상처받았다'라는 말은 마음이 다쳤다는 말이다. 손만 베어도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데 상처받은 마음을 돌보지 못하고,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지내는 삶이 얼마나 많을까. 얼마나 다친 건지 들여다볼 용기조차 없는 삶도 있을 것이고, 다친 것조차 모르고 '나는 왜 이럴까'라며 살아가는 삶도 있을 것이다.


아지를 보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학대받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게 된다. 과거에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현재진행형이자 미래완료형일 것임을 알게 된다. 그 미래완료형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나의 사랑이 부족한가 고민하게 되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랑을 줄 방법을 생각하게 되고, 함께 하는 시간에 감사하기도 하고, 부족한 시간에 아쉬워하기도 한다.

아지와 냥이와 함께 살아가며 삶을 배운다. 사랑을 배운다. 내가 가지지 못할 삶을 조금은 경험하며 산다. 녀석들 덕분에 축복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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