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주의 마음기록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랑’에 대해 생각해 왔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설명할까, 한창 연애할 때 상대방이 말했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가 원하는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등등.. 나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버리는 물을 금방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몇 번이고 물을 움켜쥐어 보듯 '사랑'이란 것에 대해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 그 단어를 생각하고 또 곱씹어 보았다.
사랑을 어떤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표현하긴 어렵겠지만, ‘사랑’에 대한 나의 정의는 장님이 만진 코끼리처럼 어느 일부분의 모양이겠지만, 최근 나는 ‘사랑’이란 ‘아끼다’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많은 경우 사랑하는 마음은, 그 사람을, 혹은 그것을 아끼고 소중히 하는 모습을 띄고 있었다.
편도 거리 220km, 3시간에서 3시간 30분이 소요되는 부모님 댁에 보통 3주에 한 번 꼴로 간다. 나는 나름 자주 간다고 생각하는데 엄마는 내가 가기 며칠 전부터 '이제 일주일만 더 있으면 보겠네, 이제 3일만 더 있음 보겠네' 하시며 나의 방문을 손가락으로 꼽으시며 내가 다녀간 지 일 년은 된 것 같다고 하신다. 아마도 같이 살아도, 엄마는 내가 그립다 하실 것 같다.
길면 2박 3일, 짧으면 당일치기로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다 출발할 때가 되면 아빠는 “와줘서 고마워”라고 하신다. 엄마도 매번 고맙다고 하시면서도 “이제 힘든데 자주 오지 마”라고 덧붙이신다.
엄마는 늘 그랬다. 보고 싶은 건 참을 수 있지만, 자식들이 힘든 건 못 참겠다고 했다. 딸이, 아들이 아까워서 설거지 한 번을 시키기 어려워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상견례 자리에 국을 못 뜬다고 구박받는 금명이를 대신해 국을 뜨며, 애순은 '너무 귀해서, 너무 아까워서 제가 안 가르쳤습니다'라고 말한다. 너무도 사랑하기에 귀하고 아깝고 소중한 것이다.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아끼는 그 마음을 아마 자식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가다가, 또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서야 자식을 애지중지 아끼며 그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하며 공감하며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어른들은, 자식을 낳아봐야 진짜 사랑이 뭔지 알고, 그래야 어른이 되는 거라고 하신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느새 다 커버린 조카 하나가 올해 결혼을 한다. 궁금했던 조카의 남자친구를, 조카가 급하게 디스크수술을 하게 되어 엉겁결에 만나게 되었다. 남에게 신세 지기 싫어하는 조카는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있다가 수술 며칠 전 연락이 왔길래 괜찮다는 조카의 말을 무시하고 찾아가 수술 당일에 임시 보호자가 되었다. 수술 당일에도 남자친구에게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는데 퇴근하고 기어코 온 남자친구에게 조카는 수술 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왜 왔냐며 뭐라고 했다.
“오지 말랬다고 안 왔으면 내가 싫어했을 거야”
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진심이었다. 조카가 수술한 부위의 엑스레이 촬영을 하러 갔을 때 나는 어색하게 처음 만난 조카의 남자친구와 앉아 조카를 기다려야 했다.
“고모님, 혹시 저한테 궁금하신 건 없으세요?”
침묵을 깨고 조카의 남자친구가 나한테 물었다.
“이름이?”
“ooo입니다”
“아 네… 반가워요”
“다른 건 더 궁금한 거 없으세요?”
“없는데요, 뭐가 궁금해야 할까요?”
“제 직업이나 사는 곳, 나이.. 등등이요…”
궁금한 게 없다는 나의 말에 청년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OO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어디 살고, 무슨 일 하고, 나이는 한 살 적고…”
나는 정말로 인적사항에 대해서는 궁금한 게 없었다. 착해 보이네, 조카한테 잘해 주겠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다가 내가 말했다.
“OO가 신세 지는 걸 싫어해서 언제나 괜찮다고 하죠? 걔가 좀 그래요. 그래도 오늘 와줘서 고마워요”
그러자 청년이 말했다.
“저는.. OO가 저를 좀 이용했으면 좋겠어요. 아프다고 말하고, 오라고도 하고 가라고도 하고.. 좀 그러면 좋겠어요. 맨날 괜찮다고 하지 않고요.”
그 대답을 하는 청년이 마음에 쏙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 주겠다는 그 청년은, 나에게 있어 때론 딸 같기도 하고 때론 친구 같기도 한 나의 조카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아끼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있다. 공들여 자른 종이인형이 소중했고, 선물 받은 필기구를 아낀 적이 있었고, 너무 소중해 아스테이지 필름으로 일일이 표지를 포장해 둔 책들이 있었다. 학창 시절 소중한 친구들이 있었고, 함께 있어 좋고 행복하고 소중한 연인이 있었고, 아끼는 가방이 있고 차가 있을 때도 있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중한 가족도 있다. 그것이 물건이건 사람이건 혹은 반려동물이건 아낀다는 건 그만큼 애정을 준다는 뜻이었고 달리 말하면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사람들이 상대를 진심으로 아끼고 소중히 대하는지에 대한 모습은 보통 행동에서 드러난다. 말(言語)로는 ‘사랑한다’고 표현하면서 단순히 상대가 해 주는 그 모든 것들로 본인이 편한 것이 좋아서 ‘사랑’으로 포장을 하는 경우도 있고, ‘사랑한다’고 표현하면서 폭력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이 물건을 아낄 때를 생각해 보라, 아이들은 부서진 장난감에 세상이 무너진 듯 울고 어른들은 아끼는 차에 살짝 긁힌 흠집에도 마음 아파한다. 그런데 그들이 표현하는 ‘사랑하는 사람’ 이 힘들고, 피곤하고, 지치고, 슬퍼하는 것에는 마음 아파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말 상대방을 아끼고 있는 걸까..
얼마 전 어느 유튜브 쇼츠를 접하고 난 후 나는 반복해서 그 영상을 보고 또 보았다. 영상에서는 여자가 집 앞에 내린 눈을 치우고 있고 집안에서 나온 남자는 여자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는다. 여자는 눈을 치우고 있다고 답하고, 남자는 왜 네가 그걸 치우고 있냐고 묻는다. 여자는 다시 자신은 늘 눈을 치워왔다고 답하지만, 남자는 이젠 네가 그런 걸 안 해도 되니 들어가서 핫초코나 마시라고 한다. 여자와 남자의 할 일을 나누자는 것이 아니다.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가 힘들게 눈을 치우질 않길 바랐을 뿐이다. 아끼고 소중해서 힘들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아끼다’의 사전적 정의는
1. 물건이나 돈, 시간 따위를 함부로 쓰지 아니하다.
2. 물건이나 사람을 소중하게 여겨 보살피거나 위하는 마음을 가지다.
이다.
본인만 소중하고 상대방은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상대방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상대방을 보살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사랑을 찾는 사람들, 사랑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본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아낄 수 있을지, 그럴 용기와 마음이 있는지, 상대방을 아끼고 있는지, 상대방이 그 아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많은 책들에서 말하는 흔해빠진 ‘나를 먼저 사랑하라’는 말을 ‘나를 먼저 아끼고 소중히 하라’는 말로 바꿔보자. 몇 주째 완성하지 못한 이 글을 보며 한동안 안으로만 침잠하며 며칠간 폭식을 하던 나는, 문득 나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 자신에게 한없이 미안해졌다. 나는 소중한 나를 아끼지 않고 있었고 보살피지 않았고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 사랑이란 결국, 누군가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가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걸, 새삼스럽게 알아간다. 그렇게 다시, 나를 아끼고, 누군가를 아끼며, 사랑을 살아내려 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존재를 향해, 조심스럽고 다정하게,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PS. 독자님들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