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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호영 Aug 26. 2021

히바_돌의 궁전 타쉬 하울리 6

리셉션 홀의 유르트


타쉬 하울리의 리셉션 홀      


하렘을 나와서 남동쪽에 있는 또 다른 궁정, 리셉션 홀이자 연회장이었던 궁정으로 들어갑니다. 칸이라면 하렘에서 비밀 통로 같은 긴 복도를 지나오겠지만 우리 일행은 하렘을 나와서 다른 문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거대한 이완 하나가 있고 나머지 삼면은 이층으로 된 건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마당이 나타납니다. 궁정에 설치된, 벽돌을 쌓아 바닥보다 조금 높인 넓은 원형 기단은 유르트를 설치하기 위한 곳입니다. 겨울에는 칸 자신이 머물기도 하고 외교 사절단에게 숙소로 제공했다고 하니, 유목민들은 실내보다는 유르트를 선호했나 봅니다.      


근대 들어 이곳에 찾아온 외교 사절단 중에는 투르크멘이나 카자흐 부족과 같이 중앙아시아 사람이 아닌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영국 군인들도 와서 칸을 접견했지요.   

  

 

타쉬 하울리 리셉션 홀(왼쪽), 리셉션홀 천장(오른쪽) *

    


인도를 점령한 영국과 남진 정책을 펴던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에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게 됩니다.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르는 그것이지요. 

일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거의 백 년에 걸쳐 진행된 중앙아시아에서의 영국과 러시아 팽창의 충돌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힘이 약한 나라의 인민들이나 약소민족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희생되었는데, 그걸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중앙아시아인 입장에서는 명백한 침략이지요.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된 계기인 영국 소설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소설 『킴』의 표지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영국인들에겐 침략이 오직 땅따먹기 게임으로만 보였을까요? 영국은 183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습니다. 러시아는 히바로 원정대를 보냈지요. 영국의 영향력이 중앙아시아로 뻗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만, 러시아는 러시아 노예 석방을 전쟁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표트르 대제 때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초겨울에 출발하였지요. 그러나 폭설과 그로 인해 많은 병사들이 동상에 걸리자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히바는 큰 혼란에 빠졌지요. 이번엔 위기를 모면했지만,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러시아가 정예부대를 중앙아시아로 돌린다면 히바 칸국의 운명은 장담할 수 없게 될 처지였으니까요.     


러시아와 힘겨루기를 하던 영국은 1840년 영국 장교 제임스 애벗을 포함한 사절단을 히바 칸국에 보냈습니다. 사절단은 여기 타쉬 하울리 리셉션 홀에 와서 알라 쿨리칸을 만나 러시아가 침공할 구실을 없애기 위해 러시아 노예를 석방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알라 쿨리칸은 이완에 탁자를 놓고 앉아 있었을까요? 저기 유르트에 앉아 있었을까요? 러시아를 두려워한 칸은 히바와 러시아 사이를 중재할 권한을 영국에게 부여하는 조약에 동의하였습니다. 애벗은 러시아 황제를 만나겠다고 떠났지요. 3월의 일입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애벗은 카자흐족의 공격과 납치 등 우여곡절 끝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으나 중재안은 거부당했습니다. 한편, 애벗 대위로부터 소식이 없자 헤라트(아프가니스탄 도시)에 있던 영국군에서는 5월에 또 다른 장교 리치먼드 세익스피어를 추가로 파견했습니다. 세익스피어도 이곳 타쉬 하울리의 리셉션 홀에서 알라 쿨리칸을 만났습니다. 

수완 좋은 세익스피어는 러시아인 노예 416명을 국경도시로 데리고 가서 러시아 정부에 넘겨주었습니다. 러시아측에서도 그곳에 억류되어 있던 히바 사람들을 풀어주었지요. 이렇게 성립된 중재로 히바 칸국에 대한 러시아 침공은 또다시 수십 년 미루어지게 됩니다.



타쉬 하울리의 리셉션 홀 벽면은 푸른 빛 타일을 붙여 구성한 규칙적인 무늬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무늬 위에는 히바의 시인 아가키의 글이 나스탈리크체로 띠 벽지처럼 삼면을 두르고 있습니다.      


리셉션 홀을 두른 아가키의 시


역사가이자 시인이자 번역가(고대 페르시아 문헌을 당시 지배적인 언어였던 차카타이어로 번역했습니다. 당시에는 차카타이어와 페르시아어가 공용어였습니다.)이기도 했던 그는 알라 쿨리칸에 의해 히바 칸국의 관료로 임명되고 군사 원정에도 동행했었습니다. 은퇴 후에는 문학가로 살았는데, 무함마드 라힘 II세에게 ‘충고의 시’라는 시를 헌정하기도 했지요. 


통치자는 많은 훌륭한 미덕을 특징으로 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교육받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고, 결정적으로 정당한 규정을 적용해야 한다.**


와 같은 그의 신념을 근거로 하여 쓴 시였다고 합니다. 삼면을 두른 그의 글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 내용을 되새겨 봅니다.     


주춧돌에 새긴 기원문     


이곳 이완에도 목각 기둥은 한 개만 서 있습니다. 어김없이 섬세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주춧돌에도 흐릿하게 문양이 남아 있습니다. 알아보기 어렵지만 이 주춧돌의 아래쪽에 문양만이 아니라 기원문도 새겨져 있습니다. 


리셉션 홀의 이완. 기원문이 새겨진 주춧돌

주춧돌의 네 면에 새겨진 기원문의 대강의 뜻은 이렇답니다. 


‘오, 알라여, 거울처럼 보는 이의 모습이 비치는 이 광이 나는 원기둥 모양의 돌이 굳건히 자리잡은 이 상태에서 안정적이고 영원하게 하십시오. 이 돌을 1248년까지 품위와 술탄의 지위, 명예, 용기, 위엄으로 치장하게 하십시오.’ **  

   

주춧돌에 새겨진 기원문은 우리의 상량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의 상량문은 가옥을 짓고 난 후, 보통은 마루 도리 즉 집 안쪽에서 보았을 때 천장에 옆으로 길게 가로지른 가장 높은 도리에 쓰지요. 가옥의 방향, 계기, 상량 날짜 등 건축 과정에 관련된 사실을 적고 공사에 관계한 사람들 이름도 적어넣습니다. 가옥 주인의 소원도 적어 넣습니다. 상량문이 길 때는 종이에 써서 넣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 지인이 지은 목조 집에 같이 갔을 때, 천장 높은 곳을 가로지르는 도리에 쓰인 상량문을 보았지요. ‘꽃과 새와 바람 더불어 숲 맑은 길을 품고’. 그때, 언젠가 우리도 집을 지으면 우리 집에도 상량문을 새겨넣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라고 쓸지 정하는 건 참 어렵습니다만,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글귀였으면 합니다.               

우리가 상량문을 쓰고 상량제를 지내듯 히바 칸국의 사람들도 대리석 주춧돌에 기원문을 썼나 봅니다. 공사가 무사히 끝나기를, 주춧돌이 건물을 영원히 받쳐주기를. 주춧돌의 기원문에서 1248년은 이슬람력을 말합니다.           

중동지역의 사람들은 달을 기반을 하는 태음력을 사용하고 있었지요. 달의 주기가 12번을 지나면 약 354일로 태양의 주기보다 11일 정도 짧아 2~3년에 한 번씩 윤달을 끼워 넣어 달과 태양의 주기를 맞추며 살고 있습니다. 이슬람력의 기원은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이주한, 히지라라고 부르는 일이 벌어진 622년 7월 16일입니다. 이날을 이슬람력 원년 1월 1일로 선포하였지요.  

    


그러면 1248에 622를 더하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력 연도가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 정치적, 종교적 필요에 의해 윤달이 남발되고 있던 상황에서 무함마드는 윤달을 넣지 않는 순수 태음력을 쓰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슬람력의 1년은 해마다 그레고리력보다 11일 짧습니다. 이를 고려하여 계산하는 방법을 간단히 생각해볼까요?            

   

2021년은 이슬람력으로 1442년-1443년이다.


우선 그레고리력 622년이 이슬람력의 0년으로 선포되었으므로 그레고리력에서 622를 빼면 이슬람력의 연도가 됩니다. 그런데 그레고리력 1년은 365일, 이슬람력 1년은 354일이므로 


                          (그레고리력 연도 – 622) : (이슬람력 연도) = 365 : 354  


에서 

                            (그레고리력 연도 - 622) = 1.03 × (이슬람력 연도)


가 됩니다. 이제 이슬람력 연도에서 그레고리력 연도를 알아내려면 식을 한 번만 더 정리하면 됩니다. 


                            그레고리력 연도 = 1.03 × (이슬람력 연도) + 622


 주춧돌에 있는 이슬람력의 1248년은 위의 식으로 계산하면 그레고리력으로 1832년입니다. 이 주춧돌은 1832년에 놓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상량문은 이와 같이 사료가 되기도 합니다. 뒤늦게 상량문이 발견되면서 역사적 사실이 수정되기도 하지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은 고려 말에 지어진 부석사 무량수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1972년에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을 해체 수리할 때 상량문이 발견되었지요. 1625년에 중수하면서 쓴 상량문인데, 1363년 공민왕 12년에 지붕을 중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보다 100년 이상 앞선 시기에 지어졌음에 틀림없겠지요. 이 발견으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부석사 무량수전에서 봉정사 극락전으로 바뀌는 일이 일어났지요.      


흙벽돌 그늘에 앉았습니다. 오아시스 도시의 그늘이 시원합니다. 햇볕에 더워 땀이 나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가을처럼 시원합니다. 주변이 사막이라는 걸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여름이면 습도 높은 찜통에서 살다가 건조한 지역으로 오니 좋은 점이 또 있습니다. 장마철마다 습기 먹어 푸슬거리던 반곱슬 머리카락이 여기에서는 하루종일 반질반질합니다.      


걸치고 앉았던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타쉬 하울리를 나왔습니다.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의 과일은 매우 달고 맛있다는 말은 숱하게 들었지요. 멜론이 럭비공만 한데, 무척 달다고. 카페에서 수박 주스, 멜론 주스를 주문했습니다. 달고 시원한 맛을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네요.     

      




* (사진 출처) Gerhard Huber, https://austria-forum.org

** (인용문 출처) Huda Salah El-Deen Omar, The Marble Bases of Kunya Ark and Tash-hauli Palaces in Khiva During the 13th AH/ 19th AD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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