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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바 May 17. 2024

뉴욕 한복판에서 에어팟 도둑과 벌인 추격전

뉴욕 레코드

서점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추레한 복장에 발음도 외모도 남미에서 온 이민자 같았다. 책 하나를 들고 와서 이 책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수상한 사람이 다가와 수상쩍은 일을 하길래 몰라, 안 좋아해. 라고 하고 말았는데 그는 개의치 않고 왜 이 책을 안 좋아하냐고 물었다.


내 머릿속에서 이 남자가 나한테 원하는 게 뭘까 수십 가지 시나리오가 흘러가고 있는 와중에, 혹시 순수한 사람을 매몰차게 대하는 걸까 봐 걱정이 돼서 웃어주기까지 했다.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못할 망정 눈치를 보다니. 지금 생각하면 등신 같다. 다행히도 그는 떨떠름한 대답에 그냥 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어딘가 찜찜했다. 지금 돌아보면 당시에는 내가 인지하지 못한 정보들을 뇌가 인식하고 본능에 신호를 보낸 건가 싶다. 생각하고 움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책으로 내 시선을 끌고 다른 손으로 내 테이블에 있던 에어팟을 훔쳐갔다는 추리 과정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작정 일어나서 움직였다. 서점을 나가려는 남자의 목덜미를 붙잡고 내놔. 내 거야. 라고 말했다. 나를 돌아본 남자는 서점 문을 열고 도망가려고 했다. 버둥거리는 남자와 몸싸움을 하며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늘 문을 지키고 있던 도어맨이 보이지 않았다. 옷 실밥이 두두득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는 순식간에 입고 있던 티셔츠와 패딩 잠바에서 쏙 빠져나와 반라 상태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를 쫓아 달리면서 도둑이야, 저 사람 잡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사활이 걸린 듯이 질주했다. 나의 외침을 들은 행인 몇몇이 쫓아갔지만 인파 사이로 쏜살같이 도망가는 그를 잡기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사거리까지 그를 쫓다가 차들에 막혀 허망하게 인파 사이로 사라지는 남자를 지켜봐야 했다.


한 남자가 지나가는 경찰차를 세워줬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찰관들은 무전기에 대고 교신을 하더니 당장 911에 전화해서 신고를 하고 이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생전 처음 911에 전화를 걸었는데 어떻게 신고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숨도 차고 정신이 반쯤 나간 패닉상태였던 것 같다. 경찰을 기다리며 한 블록 거리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카페에 놓고 온 내 물건을 좀 챙겨 와 달라고 했다. 남편이 내 물건을 가지고 왔을 때쯤 경찰차도 도착을 했다.


경찰관 두 명은 일단 서점에 가서 방범 카메라 영상을 확인하자며 차에 타라고 했다. 경찰차에 타서 서점으로 이동하는 동안 경찰관 중 한 명이 에어팟은 트래킹이 되지 않냐고 물었다. 허겁지겁 Find My 앱을 켜자 내 에어팟이 한 블록 떨어진 42번가 뉴욕 타임즈 건물에 있다고 떴다. 경찰들은 서점에 가는 대신 남자를 찾으러 가자고 했다. 남자의 인상착의를 묻더니 길거리를 주시하라고 했다. 42번가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지만 남자는 찾을 수 없었다. 경찰관들은 근처에 높은 빌딩이 많아서 트래킹 정보가 정확하지가 않고 도둑이 42번가에서 지하철을 탔을 수도 있다면서 서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타임스퀘어 인파 때문에 서점에 돌아가는데 한참이 걸렸다. 뒷좌석에 앉은 나는 땀범벅에 여전히 심장이 너무 뛰어서 심호흡을 했다. 경찰관이 처음 도착했을 때 just airpods?라고 물은 게 마음에 걸려 고작 내 에어팟 때문에 당신들 시간을 낭비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손을 내저으며 그러지 말라고 너를 돕는 게 자기들 일이라고 안심시켜 줬다.


에어팟 어떤 제품이냐고 물었던 경찰이 검색해 봤는지 이거 190달러인데라고 말했다. 나는 좀도둑 사건을 가지고 괜히 공권력을 낭비하는 거 같아 다시 미안해졌다. 그러자 그의 파트너가 아니라고 400달러는 한다고 내가 이거 사고 싶어서 봐놨던 모델이라고 했다. 그리고 보험 들어놨냐고 해서 애플케어? 하니까 경찰 리포트 번호를 주고 애플에서 새 제품을 받을 수도 있다고 알려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에어팟의 애플케어는 며칠 전에 만료된 상태였다. 친절한 경찰관은 그래도 전화해서 애플 제품 많이 쓰는 소비자라고 잘 얘기해 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몰랐는데 경찰차 뒷좌석 문은 안에서 열리지 않았다. 경찰관이 열어줘서 이거 안에서 안 열리네 했더니 응 나쁜 놈들이 도망 못 가게라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뉴욕에 살면서 누가 공격하면 페퍼스프레이를 쏴야겠다, 그 사람 기도 막혀서 죽으면 큰일이니까 바로 911에 신고도 해야겠다라고 시뮬레이션을 많이 돌렸었다. 근데 누가 내 물건을 내 코앞에서 훔쳐가는 건 상상한 적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니 경찰관들이 웃었다.


서점에 도착해서 나와 경찰관이 조서를 쓰는 동안 그의 파트너는 보안 카메라 영상을 확인했다. 나는 그 와중에 내가 몇 살인지 생각이 안 나서 나이를 여러 번 번복해야 했다. 다시 상황 설명을 하는데 도둑놈이 이 책 좋아하냐고 해서 내가 안 좋아해! 라고 했다니까 서점 직원들과 경찰들이 웃었다. 왜 웃긴 거지? 이해가 안 됐다. 조서를 다 쓰고 나자 다음 날 이 시간쯤 경찰서에 전화해서 내 케이스 번호를 물어보라고 했다. 


친절했던 경찰관은 에어팟은 찾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만 범인만은 꼭 잡을 거라고 우리는 다 잡는다는 말을 하고 떠났다. 


경찰들과 헤어지고 근처 남편 사무실에 가서 찬물을 좀 들이켜고 나서야 긴장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방금 전에 일어난 일들인데도 꼭 먼 기억을 돌이키는 것처럼 뿌옜다. 몸이 본능대로 움직이는 동안 정신은 어디가 있었던 건지 불과 몇 분 전의 일이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그 당시의 무력감이나 절망감, 두려움만 남아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도 그 남자가 불쑥 나타날 것만 같고 비슷한 인상의 남자들을 경계하게 되고 기분이 참 이상했다. 집에 도착해서 편안한 환경에 돌아오자 불쑥 무서워졌다. 만약 그 사람이 흉기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2022년부터 뉴욕시가 받아들인 이민자가 18만 명이나 된다. 시에서 이민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이 현행법상 의무여서 많은 호텔들과 학교, 경찰 아카데미 같은 건물이 이민자들의 숙소가 되었다. 확실히 2021년 뉴욕에 비해 지금 뉴욕은 느낌이 다르다. 지하철에서 껌을 팔거나, 공원에서 망고를 팔거나 그것도 아니면 구걸을 하는 이민자들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이민자 숙소로 사용되고 있는 호텔 근처에 가면 이들이 단체로 몰려있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그 남자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도망갔는지나 얼마나 마르고 작았는지 생각하니 좀 안 됐기도 했다. 그 사람의 삶이 내 삶에 비해선 많이 팍팍할 것 같아서.. 그냥 하나도 다치지 않고 지갑도 안 털리고 에어팟만 잃어버린 것에 대해 감사하기로 했다.


물론 그 남자를 잡지 못한 나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조금만 더 빨리 뛸걸. 좀 더 크게 소리를 지를걸.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쫓아갈걸. 만약 평소처럼 뉴발란스 530을 신고 있었으면 끝난 게임이었는데. 왜 하필 비가 와서 나는 부츠에 니트 치마를 입었는지.. 달리는 동안 치마와 속옷이 막 질질 내려가서 신경이 쓰였다. 근데 내가 뒤쫓는 도둑도 청바지와 속옷이 질질 끌려내려가고 있는 게 보였다.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다음날 알이 배긴 다리가 뻐근하기도 했다.


다른 유일한 후회는 왜 페퍼스프레이를 가져가지 않았지였다. 그것만 있었다면 에어팟은 아직 내 손에 있을 텐데. 근데 이 사람이 나한테서 무엇을 훔쳐갔다, 쫓아가서 잡아야 한다라는 생각들이 발현하고 그게 행동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인지조차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있었다면 남자가 서점을 떠나기 전에 잡으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뿐, 가방에 있는 페퍼스프레이를 챙길 여유는 없었다. 투쟁 도피 반응 상황에서는 한 치 앞도 볼 겨를이 없구나라는 걸 깨닫게 됐다.


평소 가방 안 꺼내기 쉬운 주머니에 늘 페퍼스프레이를 가지고 다니는 편이었다. 여차 하면 꺼내서 손에 쥐고 있으면 최악의 경우는 피하겠지라는 생각에 든든했었다. 남편이 요새 이민자 범죄가 들끓는다며 혼자 다니지 말라고 했을 때도 나는 자신만만했다. 앞으로는 테이저건도 들고 다닐 예정이다.


집에 와서 멍하니 있다 보니 바르셀로나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어느 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버스에서 내렸을 때였다. 텅 빈 광장에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등에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처음엔 무시했는데 두 번째에는 누군가 지나가면서 내 등에 뭔가를 끼얹었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인가 의심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등에 뭐가 묻었다며 휴지를 건네줬다. 고마워하며 외투를 벗으려고 가방을 내려놓은 순간 그 친절한 타인은 내 가방을 들고 튀었다. 여행자의 가방을 노리는 이인조 좀도둑의 간사한 수법에 걸린 것이다. 나는 그때도 거기 안 서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뒤쫓았다. 혈기왕성한 이십 대의 내가 너무 맹렬하게 쫓아왔는지 그들은 가방을 내려놓고 도망쳤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 기억은 여행 해프닝이 되어버렸지만 사는 터전에서 눈 뜨고 코 베인 이 사건은 나를 좀 더 세차게 흔들어 놓았다. 이 경험이 있기 전과 후의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온몸에서 분출된 아드레날린의 효과가 사라지고 나니 분하고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내가 보호받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 크고 험악한 도시에서 가장 절박한 사람과 몸싸움이 있었는데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던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보다 도우려 했던 사람들을 생각하기로 했다. 경찰차를 멈춰준 사람, 도둑을 쫓아가려는 시늉이라도 했던 사람,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했던 사람, 경찰차를 기다리는 나에게 다가와 곤경에 처한 거 같은데 도와주겠다고 했던 사람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했던 도시가 너무 무섭게 느껴질 것 같다.


이 일이 있고 밖에 나가려는데 살짝 겁이 났다. 얼마 전 뉴욕에 놀러 온 동생이 사준 티셔츠를 일부러 골라 입었다. 티셔츠에는 Be your own ray of fucking sunshine. Don't let the world get you down. (너 자신이 빌어먹을 한 줄기 햇살이 되어라. 세상에 의해 기죽지 말아라.)라고 쓰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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