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차에게
차가 없으면 다니기 힘들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일에는 기숙사에서 지낼 수 있었지만 본가가 서울이었던 나는 금요일이나 월요일에 장거리 이동을 해야 했다. 더군다나 회사는 KTX와 마을버스를 이리저리 조합해 봐도 닿기 어려운 곳에 위치해 있었다. 서울에 거주하고 계신 선배의 차를 매번 얻어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자동차를 계약했다.
생전 가져본 모든 재화 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었다. 운전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지만 초반에는 사고를 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중고차도 진지하게 고려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만 하다가는 평생 새 차를 몰아보지 못할 것 같아서 시원하게 SUV를 집으로 데려왔다.
이름은 메리라고 붙여주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차를 산다면 붙여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름이다. 최종면접 당시 면접위원은 살면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원피스’라는 만화책이라고 당당하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대답했다. 그 책의 주인공인 루피는 ‘고잉 메리호’라는 배와 함께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며 소중한 동료들과 추억을 쌓는다. 배의 수명이 다해 결국 보내줘야 하는 순간에 루피와 함께 엉엉 울었던 그 마음처럼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다. 실제로 메리는 지금껏 낯선 곳에서 일하고 수만 km를 운행하는 동안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주었다.
어떤 날은 나만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기숙사는 2인 1실 체제로 운영되어 나는 잘 알지 못했던 차장님과 함께 생활을 해야 했다. 6평 남짓한 공간에 침대만 딸랑 2개 있는 구성은 개인의 사생활이 결코 보장되기 어려웠다. 나의 룸메이트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좁은 공간에 둘이 산다는 건 서로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길게 통화를 하고 싶거나 음악을 풍성하게 듣고 싶을 때면 메리의 품 속으로 들어가 숨어있곤 했다.
메리는 훌륭한 교통수단이지만 동시에 내겐 우산 같은 존재였다. 평일에 시내를 나가거나 주말에 데이트를 할 때 눈비가 올 때면 든든한 지붕이 되어주었고, 사계절 날씨에 관계없이 항상 뽀송함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매주 금요일 칼퇴를 하고 나서 서울까지 2~3시간이 걸리던 거리는 무려 2년간 왕복을 해서인지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것만 같았다. 각종 여행이나 워크숍을 다닌 것까지 합하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메리의 나이는 나의 회사생활 연차와도 같기에 사람으로 따지면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병원에도 정기적으로 방문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신입사원 시절에 자동차 구조학이나 기초 진단에 관한 교육을 워낙 열심히 들어놓은 덕분에 귀신같이 소모품들의 교체 시기를 인지하고 있다. 주행거리를 기반으로 엔진오일을 갈아줘야 할 때면 미루는 법이 없이 즉시 바꿔준다. 잔흠집이라도 날까 하는 마음에 자동세차기를 통과하는 일은 아직까지도 없다.
1달에 4번 정도 탈까 말까 한 메리의 신발을 얼마 전 새로 주문했다. 엔진오일을 교체하러 병원에 갔을 때 의사는 타이어가 많이 닳아 위험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했다. 주머니 사정으로 인해 그때 바로 갈아주지는 못했지만 저렴한 경로를 잘 찾아 새 신을 신겨주었다.
추억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물건의 단점은 버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 메리와 함께할 일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지금은 혼자 쉬게 내버려 둘 때가 훨씬 많다. 쉴 때라도 조금 편하게 있으라고 최대한 넓은 곳에 주차하려 한다. 어떤 날은 다른 사람에게 보내줘야 하나 싶다가도 이미 형편없어진 메리의 몸값을 눈으로 확인하면 이내 생각을 접고 만다. 그러다가도 결정적으로 필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제 역할을 해주는 것이 내가 아직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하는 이유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