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삶은 공간적으로, 정서적으로 잘 분리될수록 개인의 행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그런 면에서 기숙사 생활은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것이 참 어려웠다. 가장 큰 장점은 사무실에서 내려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동일한 장점을 갖고 있는 사람의 절대적 숫자가 늘어나면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 펼쳐지기도 한다.
시내에서 늦게까지 회식을 하고 기숙사에 사는 사람들끼리 택시를 타고 돌아온 날이었다. 좁은 방에서 이미 주무시고 계신 차장님을 피해 살금살금 씻고 나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직 술이 부족한 선배는 침대에 머리를 대려던 날 일으켜 세웠고 다시 3차가 시작되었다. 사실 술을 마시는 것 자체는 내가 제법 잘하는 일 중 하나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어려운 사람과 함께 밤을 지새워가며 먹는 것은 아무리 젊었던 나에게도 체력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특히 그런 상황이 일상 속에 비일비재하다면 인생의 난이도는 한없이 상승한다. 작은 방 술판에서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가득했고 때로는 누군가의 비난으로 얼룩졌다. 신입이었던 내가 이야기의 타깃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기계 같은 리액션으로 일관하던 나에게 면박을 주는 일도 적지 않았다.
어떤 날은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질 않았다. 나는 왜 이곳에 와서 무얼 하고 있는지 한참을 되풀이해서 생각해 봐도 무지렁이 같던 신입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지방으로 발령이 나고 삶의 나침반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던 무력감과, 입사 후 드라마틱하게 찢어진 동기들과의 비교의식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누군가 시원하게 설명을 해줬다면 합리화라도 했을 것이다.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견디기 어려웠던 날은 이유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지만 행여나 옆에 누워계신 차장님 귀에 들릴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마저도 안되면 밖으로 나가 한 바퀴를 도는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던 근무지를 뱅뱅 돌았다.
1년쯤 지났을 무렵 회사는 조직문화를 조금 더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던 곳의 리더는 기숙사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올려줄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모든 직원들은 1인 1실을 쓸 수 있게 되었고 나는 나만의 공간을 획득했다. 퇴근 후에는 전자피아노를 친다거나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큰 소리로 볼 수 있게 되었고 통화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것보다 훨씬 좋았던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요소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화장실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고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원하는 시간에 먹어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야 퇴근을 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온전히 혼자만의 몸으로 꿈나라를 여행했다. 무의미하고 강제적인 기숙사에서의 술자리도 유연하게 거절할 수 있게 되자 비로소 나는 퇴근 이후 삶에서 온전히 분리되었다고 느꼈다.
중요한 건 룸메이트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회사를 연상시키는 모든 존재로부터 떨어졌다는 것이다. 사실 누구와 함께 지내건 군생활처럼 물리적으로 괴롭히는 일만 없다면 적응하고 살아가는데 큰 문제는 없다. 문제는 회사에서의 이야기를 방 안으로 끌고 들어올 때이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더라도 다음 날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잘 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역설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에 들어온 순간 의도적으로 회사 생활의 스위치를 끄고 나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 환경이 갖춰지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갈 수도 있다. 과도하게 몰입되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 기숙사에서 20분가량 떨어진 곳으로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쯤 나는 서울로 발령이 났다. 이렇게 된 김에 일과 사람들로부터 아예 물리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기로 결심했고 그 선택은 전체적인 삶의 행복지수를 향상했다. 고향이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도 떨어지기로 결심을 한 것은 인생에서 했던 가장 탁월한 선택 중 하나였다. 오히려 멀어졌을 때 정서적으로 더욱 가까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고 회사에 빼앗겼던 에너지를 회복하는 속도도 더 빨라져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더 수월해졌다.
상황이 나 자신이 장악하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 상황에 압도되면 단단한 사람도 일시적으로 자신을 잃기 쉽다. 그리고 성인에게 있어서 불가피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하는 요소는 일이다. 워라밸을 추구하고 열심히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막상 일에 치이는 상황에 던져놓으면 자신도 모르게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회사에 몰입하는 건 좋지만 인생의 전부가 회사로 물들어버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그 외에 다른 소속감을 느끼거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무언가가 그래서 필요하다. 누군가에겐 운동과 같은 취미생활일 수도 있고, 동호회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연애일 수도 있다. 다만 하면 할수록 사람을 빨아들이는 ‘일’ 만큼은 우리가 스스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