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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연수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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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Oct 21. 2023

부사수

‘처음’ 이란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는 서사를 만들어준다. 모든 행위에는 언제나 최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초콜릿을 처음 입에 물었을 때. 새로 가게를 오픈했을 때. 아버지와 함께 처음 산을 올랐을 때. 대학교에 입학하던 날. 처음 사랑을 시작했을 때.

직장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처음은 나에게 후배가 생겼을 때였다.


나보다 입사가 늦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중에서 진정한 의미의 부사수는 ‘일을 같이 하는’ 후배를 칭한다. 소위 다른 팀이거나 같은 팀에서도 일을 하는 단위 그룹이 다르면 피상적으로는 후배지만 친해질 기회는 많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도 직속 후배가 생길 거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두려웠다. 나 역시도 아직 불완전한 존재인데 같이 일을 잘해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무언가를 질문했을 때 나도 잘 모르면 어떡하나, 설렘보다는 걱정이 더 크게 다가왔던 것 같다.


우리는 그런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금방 거리를 좁혀나갔다. 나의 부사수는 열정적이고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사람이었다. 나 역시도 후배를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을 아끼지 않는 편이었고 그런 호흡이 서로 잘 맞다고 느꼈다. 

업무적으로는 대화를 참 많이 나눴다. 각자 맡은 업무를 하는 와중에는 집중해서 열심히 하는 편이었고, 새로운 것에 대해서 아이디어를 내거나 같이 고민이 필요할 때는 미루지 않고 그 자리에서 의견을 나눴다. 가장 잘 맞았던 부분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요소를 찾아갔던 것이다. 회사생활을 마냥 시니컬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과 일을 하면 일 자체가 즐거울 수는 없어도 일하는 분위기가 좋을 수는 있다. 잠깐 쉬는 와중이나 일과 후에, 혹은 점심시간을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다.


그 당시 회사에는 인사이트 트립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요즘 주목받는 문화 콘텐츠나 공간을 근무시간을 활용해 동료들과 함께 직접 나가서 체험하고 인사이트를 얻어 조직에 전파하는 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HR 관점에서도 직원들에게 좋은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이 제도를 우리는 최대한 활용했다. 다른 사람들이 이 제도를 의무적으로 행하거나 외면할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건 참 좋은 선택이었다. 한 달에 한 번은 평소에 마음먹고 가지 않으면 가기 어려울 장소를 부사수를 포함한 동료들과 함께 다녀왔고 어떤 때는 그날이 기다려졌다. 팀장님께 보고를 드리고 어떻게든 그 시간을 다른 직원들과 값지게 활용했다. 후배와 나는 동료들을 모아 남양주 인근으로 나가 복합문화공간을 보고 오기도 하고, 아예 공식적인 소모임을 만들어 업무에 새로운 시각을 더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해보기도 했다. 하루는 친환경 소재를 발굴하고 만드는 기업을 파주까지 찾아가 미팅을 갖고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제품과 콜라보를 해보려 하기도 했다. 업무를 즐겁게 하면서 동시에 추억도 쌓을 수 있었다.


스스로를 교육에 대해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한 가지 신념이 있다. 누군가를 더 나아진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속도에 맞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배사원이 생기기 전부터 그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상사가 부하직원을 다그치거나 강하게 몰아붙이는 모습을 통해 멋지고 명료하게 디렉션을 주는 클리셰들이 많이 등장시킨다. 나 역시도 명확하게 방향성을 제시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그 즉시 다정하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반드시 어느 정도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학창 시절 같은 과목을 배우더라도 사람마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늦는다고 해서 잘 못하는 것이 아니고 빠르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 8할 이상인데, 관계상의 많은 문제들은 조급한 선생님 혹은 지도자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믿는다. 가장 가깝고도 많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되어야 할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알려주고 나면 스스로 자리를 잡고 익힐 수 있게, 설령 나보다 높은 사람이 보기에 늦는 것처럼 보여도 기다렸다. 크고 작은 마찰이 있더라도 그것을 혼자 곱씹어보고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발전이 있는 법이다. 답답함을 느끼고 보채는 순간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차버리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부사수는 업무적으로나 관계적으로나 나에게 최고로 아끼는 사람이 되었다. 때로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래 기다려줄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스스로 일을 배워나가는 속도가 빨랐고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 나았다. 한 편으로는 처음 받아본 후배가 너무 훌륭해서 다음에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날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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