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

『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스물일곱 번째 장면

by 박재한
1929.11.03 광주학생항일운동,일본인과 싸우던 박준채 선생, 퍼블릭 도메인.png

<당시 일본인과 싸우던 박준채 선생님, 퍼블릭 도메인>


1929년 발발한 광주학생운동은 일제의 기만적인 문화통치와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 체제에 대한 누적된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1919년에 일어난 3.1 만세 운동 이후 일제는 '1면 1교' 정책 등을 내세웠으나(문화통치) 이는 허울뿐이었고, 학생들은 성진회와 독서회 등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항일 의식을 고취해 왔었다. 특히 이경채 학생 사건 등 1920년대 후반 이어진 일련의 동맹휴학 투쟁은 대규모 항쟁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것 같다.


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발생한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이었다. 일본인 중학생들이 박기옥 등 한국 여학생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한 사건을 두고, 현장에 있던 박준채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일본인 학생들과의 충돌로 인하여 촉발된 갈등을 두고 출동한 일본 경찰이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을 옹호하며 한국 학생만을 구타하자 광주에 재학하고 있던 학생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당시 학생은 지식인 계층에 속하는 집단이었다.) 이에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조선독립만세"와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를 외치며 제1차 가두시위(공동의 목적을 갖고 시위를 나서거나 행진을 하는 것)를 감행했다.


시위는 우발적인 봉기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했다. 11월 12일, 장재성 등을 주축으로 한 학생투쟁지도본부는 격문을 살포하고 광주농업학교,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등과 연대하여 제2차 시위를 전개했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임시 휴업 조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독서회 조직망을 통해 결속력을 유지하며 투쟁을 이어갔다.


이 운동은 신간회(新幹會)와 조선청년총동맹 등 사회단체의 진상 규명 및 지원 활동에 힘입어 전국적인 항일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12월 서울 지역 학생들의 궐기를 기점으로 이듬해 3월까지 전국 194개 학교, 5만 4천여 명의 학생이 동맹휴학 및 시위에 동참했다. 광주학생운동은 단순한 학내 문제를 넘어 민족 독립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며,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조직적 항일 민족 항쟁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광주학생항일운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Gemini_Generated_Image_4gfj7b4gfj7b4gfj.png

<AI 상상화>

1929.11.03 광주학생항일운동,일본인과 싸우던 박준채 선생, AI 채색화.png

<AI 채색화>

이전 27화26. 1926년 6월 10일 6.10 만세 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