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너스 코리아 픽처스 2』서른여덟 번 번째 장면
<6.25 전쟁 중 한강철교의 장면, 퍼블릭 도메인>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정부 수립을 하며 대외적으로 천명한 이후, 김일성은 38선 이북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1948년 9월 9일에 출범하게 된다. 애초에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유엔총회로 한반도 문제가 넘어갔을 때, 유엔총회에서는 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남북한 총선거를 지원하기로 하였으나, 38선 이남의 인구가 2,018만 명, 이북의 인구가 962만 명인 점(대략)을 인지한 김일성은 선거를 하게 되면 자신의 정당과 세력이 집권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북한 지도부들이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함으로써 대한민국은 한반도를 전체를 실효지배하지 못한 채로 정부 수립을 하게 된다. 한편 김일성은 한반도 공산화라는 일념의 목표 아래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고 스탈린의 지원 동의를 얻게 된다. 또한 북한은 지속적으로 군비를 증강하였으며, 전쟁 직전 북한은 한국보다 앞도적인 군사 장비와 물량을 갖추게 되었다.
(실제로 국방력 차이가 많이 난다. 한국군은 전차가 단 한 대도 없었지만, 북한구는 242대의 전차를 갖추었으며 한국은 공군 비행기가 22대에 불과했지만, 북한은 211대의 전투기 및 폭격기를 갖추고 있었다. 이외에도 북한군은 앞도적인 국방력을 갖추고 있었다.)
김일성의 침략 야욕으로 결국 1950년 6월 25일 새벽 기습남침을 개시한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공격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전쟁을 중지할 것을 결의하였지만, 김일성은 포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김일성이 남침을 강행하게 된 이유에는 당시 주한미군이 철수했다는 점과 미국의 애치슨 라인(민주주의 국가의 마지노선을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주장하였는데, 한국이 빠져있다.)을 보고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판단하였고, 애초에 대한민국 국군의 군사력이 열세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국은 7월 7일 안전보장이사회를 다시 개최하고 맥아더 장군을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령함과 동시에 유엔군 파견을 결정하게 된다. 맥아더 총사령관과 자유 진영 국가들의 참전으로 낙동강 전선으로 몰려 최후의 항전을 벌이고 있는 한국에게는 절호에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남북한 인구 비교>
구분
남한 (South Korea)
북한 (North Korea)
인구수
약 2,018만 명
약 962만 명
남한이 북한의 약 2.1배
기준 시점
1949년 5월 1일 (총조사)
1949년 추정치
주요 출처
대한민국 제1회 총인구조사
유엔 통계 및 북한 추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