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외로움을 우울로 빚어낼 것인가, 즐거움으로 다듬을 것인가
가끔 그런 일들을 겪는다.
내가 보는 것을 남들은 보지 못하는 일.
그리고 1~2년뒤 그들도 내가 본 것을 보게 되는 일.
혹은 계속해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거나, 나 혼자 틀리게 되는 일까지도.
내 삶은 그런 일이 많았다.
20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그것이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만 받는 삶이 길었고 가끔씩 내가 현명하다 생각하는 친구, 형, 교수님 등을 만나서
내 생각을 이해받고 공감받을 때 희열을 느꼈다.
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리석다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지능이 높고 낮음 따위에 대한 쓸모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민의식이 자리할 곳은 없다.
난 사람들과 모여있으면 즐겁다. 난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고, 술 자체보다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와 비슷한 종류의 사람을 만나는 경험은 살면서 한 손에 꼽았다.
스몰토크를 잘하고 초면의 어색함과 아이스 브레이킹을 즐기는 성격이지만,
동시에 가볍고 휘발되기 좋은 토픽보다 진중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걸 더 좋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연애, 남의 뒷담, 소문 등에 대해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은 쉽게 만났지만
예술, 경제, 철학, 삶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그 자체로 몇시간이고 즐겁게 떠들 수 있는 사람은 쉽게 만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군중 속의 고독을 자주 느꼈다.
그들이 싫은 것이 아니다.
그저 동시에 나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좋아하며 격렬하게 토론하는 것을 즐기는, 그런 사람이 잘 없을 뿐이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간은 굉장히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기질을 가지고 다른 기호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기 때문에
이 세상에 희망이 있고 변화가 있는 것이며,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고독을 피할 수 없음을 앎에도
감정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많았다.
하지만 20대 후반이 된 현재는 다르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5년에 가까운 시간을 폐관수련으로 보내면서
수없이 나 자신과 토론하고 고뇌하고 작업물을 만들어내고 실패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으며 고독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더 단단해졌다.
그렇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는 항상 '오히려 좋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원고 완성본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오히려 좋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은 부족한 부분이 당장 눈에 보인다는 것이고, 다음 스텝을 빠르게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유한 주식의 주가가 떨어졌는가? 오히려 좋다. 좋은 주식을 싸게 더 살 수 있는 기회다.
누군가 나에게 선을 넘는 헛소리를 조언이라는 포장지로 감싸 던졌는가? 오히려 좋다. 나는 저런 인간이 되지 않겠다는 반면교사 데이터가 축적됐다.
이 마인드는 이미 한참 예전부터 갖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더해 '고독에 대한 수용'을 훈련하고 '인간의 다면성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이성과 감정의 이해와 활용, 통제'의 힘이 점점 커지게 되니
이제는 고독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운명은 결정되어있지 않다, 내가 개척하는 것일 뿐.
하지만 집요하게 따라붙는 운명도 있으니
나라는 인간에게 붙은 숙명은 고독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숙명을 기꺼이 즐기리라.
우울한 폐인이 되는 것과 고독을 즐기는 자가 되는 건 한끗차이다.
진흙탕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우울한 돼지가 될 것인가
언제든 무리가 있는 숲으로 돌아갈 수 있는 외로운 늑대가 될 것인가
나란 인간은 할 수 있는 인간이고, 변화무쌍하며 고독을 즐기고 타인과 세계를 탐구한다.
이해받지못함에 슬퍼할 필요없다.
오히려 그것을 즐겨라.
나의 특별함이 증대될 뿐이고 그것은 현 시대에서 또다른 가치가 될 것이니.
이건 비단 나만이 겪는 고통은 아닐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혹은 현재도 겪고 있는 문제일 듯하다.
그런 이들에게도 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수용하고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