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시처럼 읊어볼까 편지로 적어볼까
사진 출처: 영화 <노르웨이의 숲> 스틸컷
아이를 재운 늦은 저녁은 아내와 식탁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오붓한 시간이다. 아이에 관한 시시콜콜한 발견, 양가 부모님의 다가오는 생신, 직장에서 겪은 황당무계한 일이며 어제 함께 본 드라마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는다.
화제를 주도하는 쪽은 주로 아내다. 언제나 나는 할 말을 간단히 요약해서 전달한 다음, 아내가 준비해 온 이야기를 천천히 듣는 쪽이었다. 내 것이 헤드라인이라면 아내의 것은 친절한 주석과 사설이 붙어 있는 본문인 격이다. 남편 역과 아내 역의 다이얼로그는 양적으로 꽤나 차이가 있어서, 가끔 내 역할을 잊기도 한다. 멍청히 의자에 앉아 있다가 그만 이목이 TV나 집안 사물 쪽으로 쏠리고 마는 것이다. 아내는 상대역이 없어진 줄도 모르고 한참 동안이나 모놀로그를 한다.
이내 아내는 나의 흐리멍덩한 초점을 눈치 챈다. 예전만큼 눈에서 꿀이 흐르거나 무슨 말을 하든 귀가 쫑긋하는 법이 없다고 타박하지만, 이건 짧은 집중력 탓이지 절대 고의가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부부의 단란한 대화가 서로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알고 있다. 방해 요인만 없다면 밤까지라도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화로 전화기가 뜨거웠던 그 시절처럼.
연애시절이 화제로 오를 때가 종종 있다. 우리는 분명 과거에 연애를 하고 부부가 되었으되 연애를 과거 완료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인식한다. 직장 동료, 동생, 동창생, 멀리는 드라마나 웹툰 속 커플들을 데려와 앉혀놓고 우리와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고, 특정 시점의 어떤 사건들을 현재로 소환해놓고는 한참이나 그 의미를 되풀이하여 음미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몇 개의 지점은 아주 결정적이어서, 현재와 전혀 다른 궤적의 삶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가끔 그런 삶을 상상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사귀지 않았다면.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
우리는 잠깐 손을 놓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쳐 보며 선을 하나하나 따라가 본다. 그동안 모아둔 데이터를 꺼내보고 대차대조표를 갖고 10년 치의 결산을 한다.
10년이란 남녀가 호감을 갖고 서로 알아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삶의 큰 토막이었으며, 그 어떤 중대한 생각을 정리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모든 개별적인 선의 끝에서 우린 항상 같은 결론을 낸다.
그때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어.
나는 너보다 더 좋은 상대를 만날 수가 없으니 굳이 돌아가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 아이를 여기 두고는 어디로도 돌아가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