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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마귀소년 Dec 03. 2021

관리의 즐거움 -슈케어편-

품격의 완성은 구두

사진 출처: pixabay




  현관의 신발장 전면에는 거울이 달려 있다. 출근 준비가 끝나면 가방을 잠시 내려놓고 거울에 전신을 비춰보면서 오늘의 패션(outfit of the day)을 점검한다. 직장에 나가는 차림으로 너무 가벼워보이지 않는지, 반대로 너무 멋을 부렸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지, 옷가지들의 조합이 자연스러운지를 살핀다. 전체적으로 괜찮다는 느낌이 들면 신발장에서 그날의 룩에 가장 어울리는 구두를 꺼내 신는다.


  운동화는 믹스매치라는 이름으로 아무 차림에나 다 신곤 하지만, 구두는 형태에 따라 커버할 수 있는 복식이 어느 정도 정해져있다. 그리고 운동화와 다르게 휴식이 필요해서 일주일에 한 가지만 주야장천 신어서도 안 된다. 내겐 5켤레의 신사화가 있다. 왠만하면 하루에 한 켤레씩, 오 일 동안 신발을 바꿔가며 신고자 한다.


  오늘은 코트+니트+울 팬츠를 입고 검은 색 로퍼를 신고 나갔다. 그리고 직장에서 근무하는 시간만큼 신고 돌아왔다. 신발은 그다지 더러워지지 않았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 별반 다르지 않게 깨끗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동차로 직장에 출퇴근하고 근무 시간 중에 거의 책상에 앉아있었다. 난 출장이나 외근을 거의 하지 않고 직장 건물 내에서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점심 시간에 식당까지 오가거나 하는 정도밖에 움직이지 않는다. 점심 시간에 건물 주위를 운동 삼아 도는 동료들도 있는데 구두를 신고 가기 꺼려져서 그 무리에 끼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와버린다.


  물론 책상의 아래에는 슬리퍼도 있다. 그리고 슬리퍼를 신으면 발이 훨씬 편하다는 것쯤은 잘 안다. 하지만 출근하자마자 냉큼 슬리퍼로 갈아신는 건 기껏 구두를 관리하고 신고 다니는 의미가 퇴색되는 것 같아 망설인다. 발이 아프거나 아주 캐주얼하게 입은 날에는 슬리퍼를 신고 있지만 수트나 그에 근접하는 단정한 룩을 한 날은 되도록 구두를 신고 있으려 한다.


  신고 있을 땐 더러워진 티를 잘 눈치채지 못하는데 구두는 주기적인 손질이 꼭 필요한 물건이다. 특히 아침에 신발장에서 구두를 꺼낼 때 그 티가 확연히 드러난다. 자연광이 아니라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서는 크고작은 흉터와 어디서 튀었는지 모를 얼룩, 얇게 앉은 흙과 먼지 등이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오늘 꼭 신고나가야하는 구두라면 부드러운 헝겊으로 쓱쓱 문지르는 조치만으로도 괜찮아지긴 하는데 역시 그런 상태가 되기 전에 미리 손질해주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에 브런치에 쓰려고 생각 중인 세차洗車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태 구두를 구둣방 주인에게 맡겨본 일이 한번도 없다. 돈도 돈인데 그보다도 '내 물건 관리는 내가 하겠다' 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슈케어를 제대로 시작한 건 약 6년 전이지만 아직 남에게 자랑할 만한 수준은 못 된다. 그저 구두가 남들 눈에 띄었을 때 부끄럽지 않는 정도에 그친다. 더러운 신발 때문에 나라는 인간 전체가 불결해보이거나 품위 없어 보이긴 싫으니 말이다.


  최초의 슈케어로 거슬러올라가자면 초등학생 무렵이다. 아버지는 회사에 출근하지 않는 주말에 구두를 닦곤 하셨다. 흰색 천 조각을 검지와 중지에 감고 아주 능숙한 솜씨로 구두를 문질러 윤을 내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어린이가 떠올릴 법한 용돈벌이의 수단으로써 한번씩 아버지 구두를 닦아 드렸다.


  또 하나의 기억은 훈련소에서 조교로부터 전투화에 광 내는 방법을 속성으로 배워, 별이 쏟아질 듯 빛나던 진주晉州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전투화를 닦은 정도. 그러나 어느 쪽도 제대로 된 순서와 방법을 알고 한 건 아니었다. 아버지의 구두도 전투화도 애착을 갖고 장만하거나 신고 다닌 구두가 아니니 당연하다.


  예복과 함께 생애 첫 번째 구두를 장만했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슈케어의 필요성을 느꼈다. 최고급 구두에 드는 축은 아니지만 당시 며칠을 고심하여 나름 큰 값을 치르고 샀기 때문에 잘 닦아 신고 싶었다. 구두를 신발장에 곱게 모셔놓은 다음, 슈케어 용품 판매자가 추천하는 초보자 키트를 주문해 신발장 맨 아래칸에 놓았다. 슈케어 용품을 판매하는 사이트와 여러 블로그엔 구두닦는 방법이 상세히 나와 있었고 초보자가 따라하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게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온 것이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구두를 닦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신발장에서 손질해야 할 구두를 모두 꺼낸다. 2. 끈을 풀어놓는다.
3. 말털 브러쉬로 구두의 먼지를 제거한다.
4. 가죽에 영양을 공급하는 로션을 구두 외피에 얇게 바른다.
5. 구두 색상과 동일한 가죽 크림을 솔에 묻혀 구두에 바른다.
6. 천을 손가락에 감아서 원을 그리며 구두를 문질러 광을 낸다.
7. 끈을 끼워 신발장에 넣는다.


  구두를 닦기 전에 끈을 푸는 건 슈케어 전문가가 추천한 방법인데 사실 귀찮아서 열 번 중 아홉 번은 생략하는 과정이다. 5켤레 중 세 켤레는 매끈한 가죽, 한 켤레는 폴리쉬드 레더, 그리고 한 켤레는 스웨이드다. 매끈한 가죽은 정석 대로 닦고 폴리쉬드 레더와 스웨이드 소재 구두는 한결 간소하게 관리한다. 폴리쉬드 레더는 먼지를 잘 털면 그만이고, 스웨이드는 먼지를 턴 뒤에 전용 브러쉬를 이용해 한 방향으로 빗어주는 게 다다.


  지난 글에 세탁과 다림질을, 오늘은 구두 손질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분야는 다르지만 관리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꼭 돈의 환산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잘 닦인 구두는 생활의 조각이며 취미의 일선이고, 취향으로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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