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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랑 Jun 01. 2021

첫 문장을 쓰지 못하는 작가들에 대해

밥벌이로서의 사교육 이야기 #3



 베르나르 키리니의 단편 <첫 문장 못 쓰는 남자>에서 굴드는 제목처럼 첫 문장을 쓰지 못하는 작가다. 수 년 전부터 구상한 책을 쓰기로 마음 먹은 순간, 
그는 첫 문장을 쓰지 못해 글을 더 진행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 문장을 괄호로 처리하고 두 번째 문장부터 쓰기로 한다. 그러나 곧 또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그럼 그게 두 번째 문장이라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굴드는 짜증이 났다. 불안에 사로잡힌 그에게 훨씬 더 획기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첫 문장을 괄호로 처리한다면 두번째 문장이 첫 문장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두번째 문장 역시 괄호로 처리하는 거다. 그러면 세번째 문장이 첫번째 문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세번째 문장 역시 괄호로 처리할 것이고, 네번째와 다섯번째 문장도 괄호로 처리하는 거다. 흥분의 절정에 다다른 굴드는 책의 첫 세 단락을 단숨에 써내려갔다.


˝(•••) (•••) (•••) (•••) (•••) (•••) (•••) (•••) (•••) (•••) (•••) (•••) (•••) (•••) (•••) (•••) (•••) (•••)˝


 그는 단 하루 만에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자랑스러움에 취해 그것을 두 번 되풀이해 읽고 나서 지쳐 쓰러졌다. 그렇게 해서 굴드는 한 권의 소설을 써낸 작가가 되었다. 첫 문장을 시작할 수 없어서 결국 아무 내용도 쓰지 못한 소설의 작가."(p.17)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내 글의 첫 문장을 '첫 문장을 쓸 수 없었다'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 다음 문장은 '두 번째 문장을 쓸 수 없었다'로 쓰면 된다. 그렇게 쓰게 될 글의 내용은 최종적으로 '나는 글을 쓸 수 없었다'가 될 것이다. 와, 나는 작가다! 도박빚에 시달리던 도스토옙스키도 나보다 빨리 쓸 순 없을 것이다. 옘병.


 결국 굴드처럼 나는 쓸 수 없어 쓰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자들은 서로 모여 스스로를 '작가 지망생'이라고 불렀는데 사실 모두들 알고 있었다. 쓰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글이 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언제나 글을 '지망'하는 데서 그칠 거라는 것을.




 예술고등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는 학생이 학원을 찾아왔다. 아니, 문창과 학생이 국어 학원을 왜? 나보다 훨씬 자주 쓸 것이고 나보다 훨씬 많이 읽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요즘 작가들 중에 반쯤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아니 근데 국어 학원을 왜?


 그러나 읽고 쓰는 것에 비해 국어 성적이 유달리 낮았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읽는 것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그는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심청이는 효녀인가?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해석은 자유니까. 그런데 문학 문제의 답은 하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해석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적절한 해석을 묻는 게 아니라 "<보기>의 관점을 바탕으로 해석할 때 적절한 것은?"을 묻는다. <보기>의 내용이 '심청이는 효녀'라면, 내 생각과 관계없이 심청이를 효녀라 설정하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건 문학 감상에 해를 끼치는 게 아니다. 단지 해석의 논리력을 기르고자 함이다.


 그런데 우리 학생은 지문을 읽으면서 감정을 이입하다 못해 이미 심청이가 되어버렸다. 
그에게 심청이는 효녀도 아니고 불효녀도 아니고 제3의 인물유형 어딘가에 존재했다. 선지에 그런 말이 있을 리 없다. 선생님, 답을 못 찾겠어요. 님아, 제발 그러지 마세요. 우리의 대화는 이 수준에 머물렀다.  


 그는 김승옥의 소설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1964년의 서울을 떠도는 세 남자의 방황 따위를 2019년의 여고생이 공감하기란 난망할 터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그가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것을 결단코 거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런 태도를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장 그의 국어 성적을 올려야 했으므로 그의 통제되지 않는 상상력을 두드려패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문법을 가르쳐야 했다. 기왕이면 예비 작가님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배우는 거라지만 결국 문법이란 정확히 쓰기 위한 지식이 된다는 것을 알 길 바랐다.


 문장 "내 너를 좋아해"와 "나 너를 좋아해"의 차이는 무엇일까? 표현만 보자면 붙은 조사가 다를 뿐이다. 허나 문장이 담고 있는 의미는 다르다. '이/가'는 체언에 주어의 자격을 부여하는 격조사이지만, '은/는'은 추가적인 의미를 만들어내는 보조사이다. '은/는'의 역할은 대조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붙는 순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너를 좋아해'라는 문장 너머의 맥락이 만들어진다. 두 문장 중에선 후자가 좀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사랑이란 그런 거니까. 다른 이들이 뭐라하든 나는 너를 좋아하는 거니까. 조사 하나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버려진 섬마다 꽃 피었다"라는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을 두고 조사 '이'를 쓸지 '은'을 쓸지 내도록 고민했던 김훈의 망설임을 이해할 수 있다. "꽃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지만, "꽃 피었다"는 '버려진 섬마다 (다른 건 모르겠으나 끝끝내) 꽃 피었다'고 하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김훈)"다. 김훈은 담배 한 갑을 다 태우고나서 결국 '은''이'로 고쳤다.


 이 둘을 분별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조금 더 정확하게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정확하다'는 말은 당신의 정서를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못하면 결국 읽고 쓴다는 것은 자신만의 세계에 자신을 가두는 일이 된다. 그것은 몽매한 작가의 전형이다. 당신의 꿈이 그곳에 있진 않을 것이다.


 이쯤이면 됐다. 수업 한 번에 문법과 작문 지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다니. 이 구석진 동네에 있기에 나는 너무 아까운 강사가 아닐까. 나는 자신만만하게 그를 시험장에 보냈다. 그리고 그의 시험 성적표를 받아보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방생한 나를 앞으로는 '토끼애호가'라고 불러다오.




 그래도 1년 반 남짓 함께 했다. 고3 말에는 드문드문 만났다. 예고 문창과생들은 버스를 빌려 전국의 백일장을 쏘다녔다. 백일장 '스펙'을 쌓아야 예대 문창과를 갈 수 있는 세상에 대해 할 말은 많았지만 나까지 학생에게 피곤함을 가중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수능날은 다가왔고
 그저 행운을 빌 뿐이었다.


 소식을 모르고 살다가 반갑게도 1월에 다른 고3들과 함께 찾아왔다. 
스무 살들은 스물이었으므로 자신만만했다. 귀여워. 문제는 술자리에서도 자신만만했다는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스무 살들의 주량을 의심했는데 먹다보니 역시나,였다. 내가 먹던 소맥을 탐내기에 몇 잔 주었더니 금세 취하고 말았다. 술에 취한 채 하찮은 남자들로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나는 비웃지 않으려 최대한 노력했다.


 담배를 피러 밖에 나왔더니 그가 따라 나왔다. 쌤, 저도 담배 하나만 주세요. 아, 너도 담배 피는구나.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그가 첫 연기를 내뱉을 때 알아차렸다. 콜록콜록. 그런 그의 스무 살을 가볍게 여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그만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우리는 쓰는 사람들이잖아. 그건 앞으로 세상을 계속 고민하게 될 거라는 뜻이고. 너는 예술가가 될 거야. 그러니 하찮은 사람들에게 너무 시달리지는 마. 쓴다는 것에 조금 더 자부심 가지길 바란다."


 아니다. 쓴다는 것에 자부심 가지면 안 된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자들을 본다는 건 참으로 꼴사나운 일이다. 그러나 어차피 마주할 세상, 미리 말하긴 싫었다. 그 날엔 물론 나도 취했었다.

 



 그가 재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건너 들은 것 같다. 연락하지 않았다. 그건 고객님을 대하는 사교육 업자의 철칙,같은 것이다. 마치 당신보다 더 나은 어른인 양 오지랖부리지 말 것. 필요하다면 알아서 찾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내가 스무 살에 '쓸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았다면 이후의 삶이 더 행복했을까. 모를 일이다. 내가 바라는 모습의 청춘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나는 내 생의 첫 문장을 아직 쓰지 않았다고만 생각했다. 첫 문장을 우선 괄호 쳐둔 거라고, 내 이십 대 전반부를 애써 부정했다. 하지만 재랑아, 너는 어찌됐건 쓴 것이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것은 너의 문장인 것이다.


 그의 첫 문장 또한 그의 기대처럼 쓰이지 않았다. 비록 쓰라리지만 어찌됐건 그것이 그의 첫 문장이다. 없던 것처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태도야말로 되레 그의 10대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다만 그런 말을 할 수는 있겠다. 첫 문장이 남은 글의 성패를 모두 결정하진 않는다. 그걸 알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살다보면 언젠가 나는 그의 두 번째 문장을 읽게 될 것이고 그 때 살짝 반가울 것이다. 멋진 작가와 옷깃을 스쳐간 정도의 인연이 있었다는 것에 기쁠 것이다. 그러다 나는 그걸 곧 잊을 테고, 나의 문장을 찾으려 다시 헤맬 것이다.


 오늘도 나는 학원에서 학생들을 기다린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문장인가보다.


 *

 글이 자꾸만 길어지는 것은 이리 사는 게 억울한 탓일까. 강사는 학생들을 기다린다. 작년의 학생들이 연락 않는 것은 그냥 코로나 때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괘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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