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로서의 사교육 이야기 #9
2008년 4월엔 노회찬, 심상정이 총선에서 낙선했다. 5월엔 두 달 다닌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6월엔 청소년들이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관련 없는 이 사건들이 광장에서 묘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여름이었다.
그 해 광장에는 미국산 소고기 반대, 한미 FTA 무효, 같은 구호들이 넘실거렸다. 그 장엄한 구호들이 청소년들의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어른들이 떠올린 단어는 '선동'이었다. 그 말이 반쯤은 맞았다. 그 때 그들은 선동당했다기보단 세상을 선동하고 있었다. 나도 광장으로 나섰다. 그 영광을 함께 누리고 싶었다.
외로웠다. 교복을 입은 채 삼삼오오 모여 촛불을 들고 있던 학생들에겐 묘한 질투를 느꼈다. 그 해맑은 모습을 질투했던 건 나만이 아니라서, 학교에서 나온 학주들 역시 광장 곳곳에서 그들을 감시했다. 교복을 벗고 있던 나는 학생들에게도 학주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촛불이 있었으므로 ‘밀실’에서도 ‘광장’을 욕망하게 되었다. 방구석에 혼자 앉아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인터넷으로 ‘아수나로’라는 청소년 인권 단체와 노회찬, 심상정이 있던 ‘진보신당’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던 저녁은 덜 외롭고 더 즐거웠다. 한낱 자퇴생이었던 나는 이제 청소년 활동가이자 당원 동지가 되었다.
그 해 광장의 구호는 결국 좌절됐다. 촛불은 분명 모두의 마음 구석탱이에 생채기를 남겼다. 나와 함께 한 청소년들은 다시 학교로 돌아갔고, 누군가는 “선동 당한" 과거의 기억들을 재빠르게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떤 이들은 촛불을 칭송했고 또 다른 이들은 촛불을 비웃었지만, 나는 그 두 태도에 모두 동의할 수 없었다. 촛불을 칭송하기엔 세상은 그대로였고, 촛불을 비웃기엔 촛불에 담겨있던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이 여전히 유효했다.
어찌됐건 광장을 수놓은 촛불은 꺼졌다. 광장에서 나온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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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적어도 나는, 또다시 외롭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찾게 된 광장이란 하필 ‘당'이었다. 이름은 진보신당이었고 역사의 흐름에 시비 한 번 걸어보지 못한 채 사라져버린 당이었지만, 그곳에서 보낸 10대의 마지막 3년은 내게 조선왕조 500년이었다.
나에게 당은 학교였다. 87년에는 6월만 있던 것이 아니라 7~9월의 노동자 대투쟁이 있었다는 것도, 내 고향 울산에서 일어난 전설적인 투쟁의 역사도, 한 때 그들을 감화시켰고 또 여전히 몇몇의 이상이었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모두 당에서 배웠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며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그 마땅한 말이 내겐 바로 사회주의였다.
좋은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낮에는 책을 읽었고 밤에는 술집에서 당원들에게 보충수업을 받았다. 정규직 노조원들과 비정규직 해고자들과 페미니스트들과 해직 공무원들과 성소수자들과 장애인들을 모두 그곳에서 만났다. 우리의 정체성은 단 하나도 겹치는 게 없었지만, 그 정체성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가 우리를 묶었다.
첫 직장 역시 ‘당’이었다. 고정된 직책이 있기 보단 한 명 분의 사람을 쓰기엔 애매한 잡무들을 이리저리 처리하는 알바 같은 거였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풀었다. 그러나 ‘첫 직장’이라는 단어가 늘 그렇듯, 그곳이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을 린 없다. 내게 가장 고통스런 순간은 ‘전화 받기’에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렇게 무례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선거 전후로 당에 걸려오는 전화란 대부분 욕지거리였다.
일방적인 비난의 전화를 받다보면 화도 났다. 아니 당의 독자 후보 출마 방침을 씨팔 저한테 욕하시면 어쩌자는 건가요, 욕이 턱 끝까지 차올라 부들거릴 때면 당직자들이 워워, 되레 나를 가라 앉혔다. 언제는 당원 명부를 파쇄하지 않고 폐지함에 버렸다가 “재랑이는 유신 때를 안 살아봐서 잘 모르는구나”라는 위원장의 농담을 듣기도 했다. 그게 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의 동지가 되기엔 역부족이라는 생각에 흠뻑 부끄러웠다.
어찌됐건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할 줄만 알았는데. 여전히 세상은 바뀌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조금씩 사라졌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괴로워하던 사람들은, 진보의 역사를 낙관하기보단 이상을 현실로 끌어내리는 쪽을 택했다. 그 괴로움을 이해 못할 바 아니고, 그 선택들 역시 비난할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선생들이 사라져버린 학교에서 나는 또 방황했다. 어디로 가야하죠, 아저씨. 우는 손님이 나만은 아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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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는 다른 사교육 업자와 술을 마시다가, 20대의 첫 사회생활을 ‘사교육’처럼 고효율의 게으른 일로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해로운 일인지를 이야기하는 그 사람 앞에서, 우선은 그 말에 격렬히 동조한 뒤 그러나 나는 학원이 아니라 당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더욱 지독한 곳이었겠다는 그의 말은 편협한 추측이었지만, 실제로 더욱 지독한 곳이었다는 나의 말은 오히려 사교육 업계에서나 더욱 편안함을 느낀다는 비관에 가까웠다. 더 바쁘지만 훨씬 덜 치열하다. 노동 시간 대비 버는 돈으로 따지면 진보 정당은 덤빌 수도 없다.
그러나 내게도 별처럼 빛나는 사람들과 세계가 있었고, 나는 어리숙한 청소년기를 그것들의 명멸과 함께 했다. 나같은 사람의 품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세계가 아니었지만, 그 세계를 위해 모든 내 품을 바치고자 했다.
그 해의 광장이 없었다면 지금의 삶을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지금이야 그 때를 까맣게 잊고 살아간다. 기억은 흐릿하고 밥벌이는 눈 앞에 있다. 그럼에도 그 때 배운 것들이 가끔씩 찾아와 하찮은 내 삶을 제어한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우리는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고작 이 정도의 세계를 위해서 이리 살고 있어도 ‘사회주의’라는 걸 여직 포기하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게 아닐까. 근데 또 그러면 뭐 어떤가, 라는 말을 그날 밤엔 내 앞에서 술 취해 졸고 있는 사교육 업자에게 홀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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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촛불 세대에 관한 글을 써보고 싶었다. 다들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고, 나는 여기 있다고 말하고도 싶었다. 결국 모두 실패했다. 나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참아주기에 세상은 너무 빨리 변했다. 우리는 그새 MZ 세대라는 이름을 득했다. 올드패션인 나는 다만 아직도 촛불을 떠올린다.
중앙일보에 올라온 '11학번 진보'의 감상을 읽었다. 386 운동권들에게 배신 당했다는 그의 속상한 마음을 모를 바 아니나, 역시나 소득 3분위 노동계급의 자식이었던 '11학번 진보'인 나는 의아하다.
그래서 그 때 우리의 목소리가 모두 틀렸던 건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그 때의 마음마저 부정해야 하는 것인가. 내게 진보는 '누구의 편이 되는 것' 따위가 아니었으므로, 그런 이유로 '이쪽 진영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는 그의 말에 쉬이 동의할 수가 없다. 세상은 더 진보해야 한다. 그 때까지 진보란 유효하다.
사교육 자영업자이자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는 그 자체로 모순 덩어리이다. 그 모순을 쉽게 해명할 생각 없다. 다만 그 모순이 나로 하여금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게 만드는 원동력일 따름이다.
물론 난 자유주의자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