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에 입시논술학원을 찾아갔다.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대학은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수능 공부를 한 적 없는 내게 선택지는 몇 개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H를 처음 만났다.
그는 내게 뭐하러 오셨냐고 물었고, 입시학원에 입시 준비하러 오지 그럼 뭐하러 오겠냐고 답했고, H는 살짝 갸우뚱거렸고, 나는 대체 왜 당신이 갸우뚱거리는지 몰랐고, 여하간 그럼 논술 문제를 드릴 테니 다음 주까지 답을 써오라고 하였다.
"혹시 담배 피시나요?"
"네, 핍니다."
"아, 그럼 같이 담배나 한 대 피고 가시죠."
H는 한껏 반가운 얼굴로 나를 주차장에 데려갔다. 논술학원이라 그런가, 미성년자와 이렇게 거리낌없이 담배를 나눠 피다니. 역시 글쓰는 사람들은 이리도 자유분방한가보다.
"학교는 안 다니시는 거죠?"
"네, 아무래도."
"오시면 다른 고등학생들이 있을 텐데, 방은 넓으니 그냥 아무 데나 앉아서 글 쓰시면 됩니다.
이제 시험까지 얼마 남지 않아서 수업은 거의 없구요. 저희는 뭐, 담배 피면서 첨삭하죠."
"네, 좋아요."
우리는 다음 주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집에 오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아, 재밌겠다. 입시생의 하루란 무료한 것. 나는 적어도 일 주일에 한 번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 같아 기뻤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서로에 대한 깊고 너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나는 다음 주에 드디어 알게 되었다.
일 주일이 지나서 만난 H가 나에게 건넨 첫 마디는 이런 거였다.
"내 존댓말 내놔."
"네?"
"미성년자인지 몰랐어. 그렇게 안 보이는데." (여기서 조금 빡쳤다.)
"학생 등록할 때 92년생이라고 썼잖아요."
"못 봤어. 그리고 92년생이 미성년자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래도 그게 제 책임은 아니잖아요."
그러게, 하는 눈빛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역시 당신도 구린 어른이구나.
"그럼 자퇴한 거야?"
"네, 탈학교생이에요." (그 와중에 나는 단어를 정정하고 있었다.)
"언제?"
"열일곱에요."
"왜?"
흠, 그걸 말하려면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내가 열일곱이 되던 해는 2008년이었고, 그 해 광장에는 '촛불'이라는 것이 넘실거렸고, 하필 그 때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따위를 읽었었고, 그래서 나는 촛불의 '자유'와 책에서 읽은 '탈주'를 미친듯이 욕망했고, 마침 기형도를 좋아한다던 학교의 문학 선생이 학생들을 야구빠따로 후드려 팰 때 나는 결심했다. 집에 가자.
"그럼 그동안 뭐하고 살았어?"
이것도 이야기가 길 텐데. 아까 말했듯 2008년엔 '촛불'이 있었고, 거리에 나선 당시의 진중권(!)같은 명사들은 '진보신당'이라는 곳에 있었고(아 못 알아 들으실 테니 '심상정', '노회찬'이 있는 정당입니다), 나도 그런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입당했다. 나름대로는 당 활동으로 열심히 쏘다녔고 그러다보니 2년이 지났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죠?
한바탕 얘기를 주고 받은 후, 우리는 어색하게 담배나 뻑뻑 피어댔다. 다시 이야기를 이은 건 H였다. 그럼 써온 논술 답안을 좀 볼까. 내가 건네준 답안을 빠르게 훑은 그가 말했다.
"무한도전 좋아하니?"
"어 ... 네."
"논술은 무한도전 같은 거야."
"네?"
"핵심은 자막이지. 자막을 존나 다는 거야."
아리송.
"무한도전의 재미는 자막에 있는 거 아니겠어? 상황극 속 드립들에 자막을 덧입혀 재미가 더욱 빛을 발하는 거지.
그러나 자막은 언제나 상황 안에 있어야 해. 논술 답안도 마찬가지. 문장은 언제나 지문 안에서 발휘되어야 해. 글 잘 쓰는 게 눈에 보여. 문장이 좋아. 하지만 제 주장이 강해서 자꾸 지문을 벗어나려 해.
김태호 같은 마음으로 지문을 더 들여다 봐. 그걸 무시해서는 좋은 자막을 달 수 없는 거야. 힘은 좀 빼고."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나는 그의 농담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가 구린 어른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
이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물론 술에 취한 H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 "너, 나의 친구가 되어라.", "저희 18살 차이 나는 거 아세요?", "뭐, 기대승과 이황 같은 거랄까.", "그럼 편지만 주고 받으면 안 될까요?" 그러나 편지만 주고 받기엔 서로가 술을 너무 좋아했다. 논술 시험 전날마다 시험 전에 밥 사주겠다는 핑계로 만나서 서로 왕창 술을 마셨다.
그해 대입 논술은 모두 떨어졌다. 잘 쳤냐? 시험이 끝나고 그가 내게 전화 했을 때, 나는 술이 덜 깨서 당최 문제가 읽히지 않더라,고 답했다. 죄다 망해버렸지만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언제나 즐거웠다. 당신을 처음 만난 날 들었던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아, 재밌다.
나는 학생들에게 H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련된 비평을 하고 싶었고, 익살스런 개드립을 날리고 싶었다. 부모와 학교 선생에게 할 수 없는 말을 들어주는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한결같이 실패했다.
스무 살부터 H와 함께 일했던 논술 학원의 첨삭 알바를 그만 둔 후, 나는 새로운 학원에서 처음으로 독서논술 단독 수업을 배정 받게 되었다. 1:1 수업이었고 그래서 잘하고 싶은 마음에 전날 수업 준비로 밤을 샜다. 수업에 들어와 나는 밤새 만들었던 교재를 펴놓고 이것저것 떠들었다. 읽는다는 것의 효능, 글쓰기의 중요성, 올바른 문장을 구사하는 스킬, 읽고쓰는 것을 통해 찾게 될 진정한 나의 내면 따위를. 학생의 눈은 감동으로 빛났다. 나는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그럴 리 없다. 학생은 너무 졸렸고, 그러나 1:1로 떠드는 수업에서 내 눈을 피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눈에 힘을 주며 졸음을 참고 있었던 거였다. 나중에 가서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뭐한 사람인지 알아?", "우리나라 쳐들어온 사람이요!", "언제 활동했던 사람이지?", "음 ... 일제 강점기?"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이제 내가 만나게 될 학생들이란 이런 식이겠구나. 나는 일제 강점기와 임진왜란은 다른 거라는 이야기나 하며 살겠구나.
술에 취해 나는 H에게 떠들어댔다. 요즘 제가 어떻게 사는지 아세요 킥킥, 학생이 광복이 1975년이래요, 부모님이 광복 때 태어났니? 물었더니 아, 아니구나, 이러더라. 근데 걔가 고등학생이야. 쌤, 나는 강사 아니야. 베이비시터야, 베이비시터.
당신께 받은 감동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데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이리 삐뚤게 하고 있었더니 H는 그런 나에게 이리 덧달았다.
"이것은 밥벌이. 진지하게 임해야겠지만 장엄한 건 안 좋지 않을까. 친구의 윤리와 강사의 윤리는 다른 것. 학생들을 보면서 그것부터 생각하자. '너희들의 인생은 내 알 바가 아니다.' 단지 서로의 필요를 견인할 따름이야. 우리는 학생들의 생을 책임질 수 없어. 다만 만나는 동안 최선을 다하는 거지. 광복이 언제인지 친절하게 알려줘. 그거면 돼."
학생과 강사 사이의 건강함은 적당한 거리감에 있다는 것을, 그 후에 나는 오래도록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장엄하다. 시험 성적이 안 좋을 수는 있지만, 배움에 그리 소홀할 수는 없는 거라고 학생들을 꾸짖는다. 자주 무력하고 보람은 드물게 찾아 온다. 그러나 욕심을 덜어내야 한다. 내 가치관을 심겠다는 것은 오만하고 건방진 일이다. 그건 학생도 강사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들이 가진 빈 석판 위에 몇 글자 얹을 뿐이다.
스물 댓살에 만난 학생들은 이제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농담을 주고 받을 정도는 되었고 술 사달라고 가끔 찾아올 때면 반갑게 마주한다.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그들이 살게 될 인생에 잠깐 스쳐 지나간 덜 나쁜 꼰대 정도로만 남을 수 있다면, 기쁜 일이다.
그러나 자주 친구가 그립다. 내가 이리 망한 것은 다 당신 때문이라고 투정도 부리고 싶다. 나를 학원에 덩그러니 남겨 두고 그는 떠났다. 요즘 뭐하냐고 물었더니 섬에서 낚시를 한단다. 이건 뭐 고전 시가에 나오는 안빈낙도의 삶도 아니고, 어이가 없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이 바라는 편안함에 이르렀나요. 당신의 인생은 결국 당신이 책임지겠다만.
이번 휴가 때는 그가 있다는 바닷가로 갈 것이다. 가서 또 먹고 산다는 것의 지겨움을 한껏 이야기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