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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Aug 24. 2022

나의 10살, 수포자의 탄생 그리고 빌 게이츠

30대 이전의 삶은 대부분이 무채색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까만 기억은 10살이다. 


자식들 중 첫째인 나에게 특히 애정이 없던 아버지는 인격이 완성되기 시작하던 시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장남의 위치를 대리해야 했다. 원래부터의 장남 역할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 자리에 대한 확고한 자리매김을 증명받고 싶었던 콤플렉스 탓인지 효자를 넘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어도 여전히 부모에게 종속되어 어른 아닌 나이 먹은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본인의 부모가 본인의 배우자, 자식에게 모질게 대해도 그저 묵인하거나 상당 부분 악행에 동참했다.


할아버지는 나와 여동생을 낳은 엄마를 무척이나 학대했다. 그리고 친척 경사 날에 만난 엄마의 언니인 나의 큰 이모 면전에서 **엄마가 아들을 못 낳으니 우리 아들에게 첩을 얻어주어 아들을 보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고, 아빠의 휴가에 맞춰 시골집에 가있던 중 할아버지 집의 전축이 갑자기 작동하지 않자 나와 여동생을 온 동네 사람들과 알지도 못하는 친인척 앞에서 세워놓고 너희가 그랬다고 소리치며 욕을 했으며 대학 입학을 앞둔 내게 세뱃돈으로 5000원을 주었다.


10살,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낳기에 매달리며 성지 순례하듯 유명 산부인과를 찾아다니던 엄마, 분명 같은 집에 살았는데 뭘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아빠의 그늘 아래서 안타깝게도 대놓고 촌지를 요구하던 담임교사를 만났고 더욱 안타깝게도 부반장을 했다. 보통 학급 임원을 하면 엄마들이 종종 찾아와 인사도 하고 반에 간식도 돌리는 게 관행이었는데 우리 엄마는 자주 병원에 갔고 나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 담임교사는 자주 나를 따로 불러 엄마 한번 오시라고 전하라고 했지만 그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눈치는 있었는지 말하지 못했고, 담임교사는 유난히 나를 때렸다. 교실에 뭔가 흐트러져도 부반장이 잘못해서, 자연책에 나오는 금붕어 있는 어항이 교실에 없는 것도 부반장이 안 해와서라며 아이들 앞에서 심하게 매질을 했고 똑같이 시험을 보아도 꼭 나만 찍어서 나오라고 하여 반 아이들이 틀린 수만큼 때리고 맞다가 엎어지면 일으켜 세워 얼굴을 꼬집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금붕어가 든 어항을 준비 해오라며 매를 맞은 날, 집에 가서 얘기하니 낚시를 좋아하던 아빠는 붕어를 낚시터에서 잡아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고 금붕어가 든 어항이 없이 다음날 학교를 갔다. 또 매를 맞았다. 그렇게 매질을 하고 나면 너희 엄마는 어쩌면 학교에 한 번도 오지 않느냐고 했다. 부반장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반 아이들 앞에서 손가락질을 했다. 임원은 학급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우리 반 부반장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유난히 산수를 어려워하던 나를 수업시간에 꼭 앞으로 불러 칠판에서 문제를 풀게 했고 틀리면 얼굴을 때렸다. 그게 무서워 앞에 나와 문제 풀 사람 고르는 순간이 되면 책상 밑으로 고개를 숙여 안 보이도록 웅크렸지만 늘 나를 짚어 냈고, 아는 문제도 무서워 풀지 못하면 머리 위로 온갖 것이 던져졌다. 


그렇게 모욕감을 주는 것만으로는 엄마를 모시고 오지 않는 괘씸함의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담임은 나와 어울리거나 말을 하면 그 아이도 때렸다. 자연스레 아이들이 내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2학기 때에는 학급 임원은커녕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아주 조용히 지내기 위해 노력했는데 3학년이 거의 끝나던 무렵, 애국심을 주제로 한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담임은 내던지듯 상장을 주었고 바닥에 떨어진 상장을 주어서 얼른 가방에 집어넣었다.


자존감은커녕 존재까지 부정당하던 10살의 시기를 지나며 숫자만 보면 공포감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수포자가 되었다.


숫자 감각이 필요한 직업, 마케터로 15년을 살면서 가장 내가 예민해지는 순간은 바로 매출 분석하고 숫자 관련 업무를 할 때이다. 회사를 옮길 때마다 구매 신청하는 문구류의 1번은 계산기이며 가장 사랑하는 프로그램은 엑셀과 구글시트이다. 


우리나라 입시제도에서 수학이 가진 엄청난 위력 앞에서 나는 너무나도 무력했다. 아무리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온몸으로 숫자의 영역을 거부하며 뇌가 문 닫고 휴업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부끄럽지만 수능의 수리탐구도 모두 찍었다. 


성적을 만회하기 위해 수학을 제외한 과목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경영학을 전공하며 필수 과목이던 통계 수업은 개강부터 종강까지 늘 유체이탈 상태였고, 아무리 교재를 읽고 노력해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어 괴롭다는 일종의 포기 이유서를 기말 시험지에 적어내고 나왔다. 직장생활에서도 부족한 숫자 감각을 만회하기 위해 수없이 메모하고 기록하고 엑셀과 계산기를 가까이해야 했다. 이것은 더 이상 성적이 아닌 생존의 문제였다.


수학적 사고 결여 및 숫자 적용 장애라는 어려움을 딛고 그럼에도 난 살기 위해 오늘도  엑셀과 계산기를 옆에 끼고 살아간다.


사주를 보면 늘 인복 없이 홀로 고군분투, 정을 받지 못해 외로운 삶이라고들 하는데 그래도 탈탈 털어 만든 나의 인생 속 귀인 리스트의 상위권에는 빌 게이츠가 있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밥이나 먹고살고 있을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빌 게이츠는 대단한 사람이다.

언젠가 이 글을 볼 수도 있는 빌 게이츠에게..


THANK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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