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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May 22. 2023

사장처럼 일하면 사장'만' 좋아하는 사람

노력은 배신한다. 배신하는 힘을 만드는 노력만이 진실.

주어진 일에 책임을 다하고, 더 잘하기 위해 업무 외 시간을 쪼개어 공부를 하고 그래도 모르면 묻고 확인하며 열심히 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인정과 함께 그것이 돈으로 환산된 연봉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처음부터 갖지 말라고 누군가 일러줬다면, 지금의 나는 아마도 부장 정도의 직급을 갖고 유튜브의 '옛날 예능 몰아보기'를 하루 종일 무음 재생시켜 놓은 상태로 메일 확인, 메일 쓰기, 때 맞춰 올라오는 부하 직원들의 보고서를 느긋하게 확인한 뒤 더 수정, 보완할 사항을 진지하게 일러주며 위엄을 과시했다가 정기 회의에 들어가 적당히 한두 마디 던지며 존재감을 보여주고 만만한 부하직원에게 모멸감과 더불어서 그러니까 열심히 해서 상쇄하라는 가스라이팅을 시전 하며 살고 있을지 모른다. 꽤 높은 연봉과 강남 자가 아파트, 골프를 취미로 하는 라이프스타일은 덤이며 수준 있는 사람들과의 격조 있는 조우를 목적으로 하는 사교모임 또한 관심 갖고 참여할 것이다.


첫 사회생활을 하던 시기의 나는 근로계약서를 2부 쓰고 1부는 본인이, 1부는 회사가 나누어 보유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그 당시의 나는 월급의 반을 부모님의 부채를 갚는데 쓰고 있었다. 돈은 절실했고 그 돈을 받기까지의 절차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무도 일러주지 않았던 탓도 있지만 그 절차를 살피기에는 당장 먹고살기에 바빴다.


그렇게 첫 정규직이 되고 사장은 내게 ‘사원의 자세’라는 책을 권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 그 책의 내용은 자세하게 기억이 안 나지만, 능동적이고 모든 일을 내 일처럼, 분골쇄신, 고군분투, 최선을 다해 혼신을 다해 업무 능력은 물론 태도까지 빈틈없도록 몸 바쳐 일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축구 국가대표 유니폼에 새겨진 투혼이라는 글자처럼, 사원이라 함은 '못한다.' 라는 말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주어진 일 앞에서 끝까지 싸워 이긴다는 단단한 기백으로 달려들어야 하는 것이 사원의 자세라고 내 안의 직장인 회로에 입력되었다.


그 오입력으로 15년의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사원의 자세를 임할 수 없게 되었다.


때때로 일에서 재미를 느꼈고, 빈틈없이 정리된 문서에 쾌감을 느꼈다. 주어진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수행해 내는 나 자신에게 매력을 느끼며 즐거워했다. 하지만 이것은 온전한 나의 기쁨이었다. 스스로에게 느끼는 자아도취에 불과했다.


회사를 내 능력의 평가지라고 생각했기에 더 좋은 점수를 위해 노력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에 어두웠다. 모두가 같은 시험지가 주어지지 않고, 같은 잣대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며 평가는 주관적임을 넘어 편파 그 자체임을.


기회는 노력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자를 이용하는 자의 것이 직장의 섭리였다.


부패의 단계를 넘어 이제 피딴처럼 하나의 엄연한 발효 완성체에 이르러 자유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 일종의 치외법권 세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전태일 열사의 부르짖음이 50여년을 지난 오늘에도 간절한 한국 직장인 생태계 속에서 사원의 자세를 실현하면 사장만 좋아하는, 모두가 미워하는 '만년 사원' 내지는 '만년 대리'가 된다.


일을 해결해 내는 사람은, 사장'만' 좋아한다.
상사는 본인이 일을 '해결한 것'처럼
만들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


진짜 일을 '해결한 사람'은 알게 되면 손뼉치며 좋아해 줄 '사장'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묻히고, 잊히고, 사라진다.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살기 위한 노하우, 얼마나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지, 지금 미래를 대비하지 않으면 어떻게 도태되는지, 인정과 보상의 주도권을 잡는 직장인이 되기 위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를 강권하는 수많은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 릴스의 파도 속에서 생각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멘토를 자처하는, 그들의 자기계발 강권 시대 속에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모멸감이 이어지는 직장생활 속에서도 외국어 공부를 하고, 때때로 돈을 모아 해외여행을 떠났던 것은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다. 단순히 승진하고 싶어서, 월급을 올리기 위해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현실은 행복에 대한 자기 정의조차 내리지 못했다.


이제 조금만 노력하면, 버티면 억대연봉 찍는 직장인 대열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믿으며 야심 차게 이직했던 2021년. 여름을 목전에 두고 조금씩 더운 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날. 내 안의 모든 것이 다 타버린 듯한 공허함과 함께 누가 던진 지도 모르는 묵직한 덩어리 하나가 옆머리를 소리 없이 강타했고 24시간 흐르는 눈물, 생각이 멈춘 머리, 소리와 글자를 인식하지 못하게 된 감각 장애 모습으로 찾아온 우울증을 떠안고 함께 웅크리며, 침잠하던 꽤 긴 시간이 지나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행복의 정의를 찾았다.


못 견디게 슬프고, 못 견디게 힘든 일이 없으면 행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부분의 우리는 이미 행복하다.


다시 말해, 직장은 애초 행복을 찾거나 구하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약해지면 가장 먼저 야멸차게 배신할 곳, 신성한 노동의 장이란 이름으로 분식회계한 ‘직장’을 나 역시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힘을 위해, 오롯이 그것을 위한 노력만이 배신하지 않는다.


가장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이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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