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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정하 Jul 29. 2023

억대 연봉 찍고 3.5개월 후 우울증 진단서를 제출했다

episode 2. 하늘은 하얀색

https://brunch.co.kr/@unplugedgirl/38


지난 이야기에 이어서..



만취 상태에서 깨어나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지난밤을 복기하면 떠오르는 그 끊긴 필름처럼, 그 해 초여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은 내게 영화 스틸컷처럼 남아있다.


 눈물이 24시간 멈추지 않기 시작하고 나서 곧이어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뇌가 멈춘 듯 그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아 최선을 다해, 집중하려 해도 되지가 않았다. 집중은커녕 생각이라는 것이 없었다. 진정한 무념무상이었다.


생각의 엔진이 멈추니 수동으로라도 움직여야 했다. 생각과 의사를 말로 표현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온몸의 힘을 다 끌어와도 단어 하나 내뱉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먹고살아야 하기에, 십수 년간 버텨왔는데 이렇게 바닥으로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에 기를 쓰고 출근을 했고 눈물은 쏟아졌으며 입은 닫혔다.


나를 바라보는 상사의 눈빛이 달라졌다. 의문에서 멸시로, 멸시에서 경멸로, 경멸에서 혐오로 바뀌는 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기억이 난다.


입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노트북 화면에 분명 문서가 떠있는데, 글자가 읽히지 않았다. 화면이 하얗게 되거나 까맣게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읽고 써온 그 글들이 그 어떤 의미로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냥 하나의 형상이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글자를 읽지 못하게 된 그 상황에서 '큰일 났다.'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제의식도 없었고, 이렇게 된 내가 당황스럽지도 않은, 걸어 다니는 식물인간이었다.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동시에 나는 듣지 못하게 됨을 알았다.


분명 누군가 말하는데, 사람들의 소리가 존재하는데 내 귀에 꽂히지 않았다.


소리와 공간이 나와 완전히 분리되고 공기 속에 글자가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무인도 같이 물끄러미 있을 뿐이었다.


산 송장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다.


멍하니 사무실 창밖의 하늘을 보았다.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 장면은 정신의학과의 상담실로 이어진다.


피곤과 권태가 결합된 표정의 짜증의 인간화가 바로 이것이라는 느낌을 물씬 뿜어내던 의사는 증상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횡설수설, 그마저도 겨우 하나씩 단어로 내뱉으며 연신 땀을 닦는 내게 말했다.


’극도의 심각한 우울증 증세네요.‘


당신 같은 사람을 하루에도 90명씩은 만난다는 듯한,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약을 처방받으라 했다. 당분간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과 함께.


우울증 증세로 약 처방을 받아 복용을 시작했다고 상사에게 밝혔다.


이미 나를 바라볼 때면 이마에 주름을 잡고 입꼬리를 올리던 상사였지만, 이런 심각한 신변의 문제는 알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금 놀랐고, 약 잘 먹으라는 말을 했다.


성과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기여하지 못하는 나는 하루라도 빨리 처분해야 할 폐기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의 상사는 그런 폐기물을 팔 걷어 부치고 치워야 할 사람이었다.


어떻게든 뭔가를 해보려 안간힘을 쓰며 수 없이 머리를 흔들어가며 책상에 붙어 기획서를 썼다.


상사는 나의 결과물을 펼쳐놓고 팀원들에게 지적해 보라고 했다. 눈, 귀, 입이 닫힌 것을 억지로 열고 뒤집어 어떻게든 버티던 상황이라 그녀의 의도된 난도질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나는 밥값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경험했고 인지하고 있는 회사란, 밥값을 못하면 나가야 했다.


한마디 반박도 하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칼 달린 팀원들의 지적을 받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창밖의 하늘을 보는 것뿐이었다. 무슨 색이었는지, 그날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후 나는 상사와 두세 번, 인사팀과 또 두세 번의 면담을 거쳤고 가장 빠르게 예약이 가능한 종합병원에 가서 진단서를 발급받아 제출했다. 그때 몇 가지 문서에 서명을 했던 것 같다. 한 달의 병가가 주어졌다.


명목 상으로는 한 달의 휴가였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일대일 면담에서 내게 다시 돌아와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라며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상사는 '잘 쉬고 오라' 며 팀 회의에서 나의 한 달 부재를 짧게 알렸다.


마지막 퇴근을 했다.


회사 정문을 나서며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하얬다.

그 해 여름은 온통 하얀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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