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정의당 대표의 장혜영 의원 성추행 뉴스를 접하자마자 입술에서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욕으로 전도된 내 머리를 순간적으로 관통한 것은 ‘변경’의 문장이었다.
당신들은 내 전망의 결여를 걱정하지만, 나는 오히려 지나치게 무성한 당신들의 전망을 걱정한다. 당신들은 내 무이념을 의심쩍어하지만, 나는 또한 당신들의 이념 과잉이 못 미덥다.
이 문장은 주인공인 명훈과 숙식을 함께하는 황형과 김형이 명훈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 벌이는 이념논쟁의 한 토막이다 - 주로 듣는 입장이며 또 그만큼 수세에 몰리는 김형은 자신이 지식인으로서 시대의 요청에 적극 부응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수정주의자라고 몰아세우는 황형에게 자신의 미적지근함의 이유에 대하여 위와 같이 대꾸한다.
밤이면 밤마다 허깨비처럼 찾아드는 이 논쟁에서 소위 ‘변경주의자’인 황형은 남북으로 갈라진 이 땅은 각각의 세력을 대변하는 미국과 소련이 충돌하는 변경이라고 정의하면서, 변경에서의 모든 행위는 (적에게 이롭거나 아군에게 이로운) 제로섬 게임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변경은 단순히 중심에서 멀리 위치해 있는 ‘주변’과는 구분된다. 그렇다면 변경주의자의 선택은 필연적으로 양자택일일 수밖에 없는데, 화려한 상황설명과 정교하게 쌓아 올린 논리에도 불구하고 김형은 미국과 소련 중 택일하도록 강요하는 황형의 주장이 못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황형은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몸으로 겪으면서 적절하게 현실과 타협하는 기자의 삶을 살게 되며, 김형은 도미하여 박사학위를 받아 이후 대학에서 ‘변경주의’를 강의하게 된다)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의 유년시절 경험을 투영한 작중 인물인 인철을 통해 극단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보다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성향 또한 유난스러운 데가 있다는 것 또한 인정하고 있다.
뒷날 인철은 한 유망한 작가로 인정받을 때까지 단 한 권의 문예이론서도 읽지 않았을 만큼 이론에 대한 지나친 경계를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 방면으로 자리를 잡아갈수록 이론으로만 예술하려는 무리, 특히 어쩌다 자신이 전공하게 된 인구어의 한 갈래가 결정해 준 특정의 이론에 송두리째 영혼을 내맡기고, 우매할 만큼 비판도 회의도 없는 습득 과정을 반복한 뒤 이윽고는 거기서 얻은 자로만 예술을 재려 드는 무리에게는 숨김없는 혐오와 경멸을 드러냈는데 그의 성향의 뿌리는 아마도 그날의 미술 시간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성추행을 저지른 이가 정의당, 즉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스펙트럼에서 상대적으로 중간에서 멀리 떨어진 정치단체 소속의 대표라는 것만으로 별안간 이문열의 문장이 떠오른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진보의 성배와도 같던 도덕성에 흠결이 생겼다는 것 또한 최근 그러한 사례를 다수 보아왔기 때문에 딱히 충격적이진 않았다. 도미노의 마지막 조각이 넘어져 더 이상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그제야 도미노 게임 한 판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는 정도라고나 할까.
이후 피해자인 장혜영 의원의 페이스북 글을 읽게 되었는데, 증기처럼 형체가 모호했던 의아함이 그제야 응결되어 인지할 수 있는 형태로 눈앞에 드러났다. 그리고 이제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학창 시절 - 나름대로 뜨거웠던 그러나 그 끝은 씁쓸했던 - 의 상처가 드러났고 그 사이로 차가운 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질감이었다. 입에 넣으면 쇠맛이 나는 이 이질감은 분명히 과거에 경험한 바 있다.
그토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이와 같은 표현은 믿었던 동지에 대한 크나큰 배신감에서 비롯된 좌절감, 그리고 피해자로서의 절규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장 의원의 호소의 진정성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한정하는 듯한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이라는 단어가 끝내 거슬렸다. 정치가 지향해야 할 곳은,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장 의원이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닌 ‘모든’ 이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대중을 향한 메시지는 항상 ‘Urbi et Orbi’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이란 성향상 당파적일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러한 당파성 또한 보편성에 머리를 두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종철 대표의 성추행에 대하여 가장 분노하는 이들은 겉으로만 분노하는 척하는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고, 대다수의 평범한 딸바보들이다. 평범한 이들의 분노에는 구질구질한 설명이 필요치 않은 직관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내 딸에게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나와 나의 가족만의 안위를 걱정하는 자로 비판받아야 할까. 혹은 소시민으로 사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에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 할까.
또한 ‘처참한’ 실패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문맥상 아마도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함량 미달이나, 근대화된 기술발전에 부응하지 못하는 전근대적인 사회적 인식을 처참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니 처참함은 실체적이라기보다는 관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의원이 느낀 처참함에 대하여는 그 성격을 불문하고 동감한다. 관념적 처참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일상 회복의 전제조건이라면, 그 또한 수긍한다. 그러나 나의 동감은 관념적 처참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실체적 존엄성이 훼손되었다는 점이 처참하다는 것, 그리고 일상의 회복을 위해 반드시 처참함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지이다. 나는 정의당이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도 관심이 있지만, 그보다는 피해자가 회복하고 또 잘못한 이가 지은 죄에 합당하는 벌을 받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프루스트가 마들렌 냄새를 맡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 것처럼, 정의당 대표의 성추행은 까맣게 잊었던 나의 과거를 소환했다. 그리고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늘 못마땅했으며 감추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드러나게 마련인 지식인들의 엘리트주의와 관념주의에 대한 나의 이디오진크라지가 이문열의 문장을 소환했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 군 호봉 가산 문제로 제로섬으로 치닫는 인터넷 토론 공간이, 새로울 것 없는 남녀 갈등이, 새로운 변경으로 느껴져 쓸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