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Epilogue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인생은 언제나 내게 친절할 것이라 믿었었나 보다.
하지만 인생은 불친절할 때도, 불운할 때도, 불공평할 때도, 부조리할 때도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인생의 배신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당한 사실이 괴롭고, 분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내 잘못은 아니었다.
잘못이 있다면 순진하게 인생을 믿었던 탓이었을까??
인생에 배신당한 이들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인생을 알면 알수록 그 두 얼굴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인생은 원래 더러운 것이었다.
'더러운 인생,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나와 같은 피해자들과 함께 삶을 원망하고, 부정했다.
인생에게 호되게 당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남일 같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공감'했다.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은 '공감'이 아니었음을.
그러나 이제 고백한다.
내가 진정 원했던 것은 '공감'이 아니었음을.
내게 필요했던 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인정'이었다.
잘못한 건 인생이라고.
인생을 생산적으로 살기 어려운 것은
인생이 널 배신한 탓이라고.
나와 같이 인생에 당한 이들은 '공감'을 통해 나를 지지해 주었다.
그렇게 나의 실패가 덜 부끄러워졌다.
인생은 그저 호의를 베풀지 않았을 뿐
그동안 인생에게 배신당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왔지만,
인생이 날 배신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어떤 약속도 어긴 적이 없었다.
애초에 나와 약속을 한 적이 없었으니깐.
특별히 나에게만 못되게 군것도 아니다.
나 말고도 자칭(?) 피해자는 많았으니 말이다.
호의적이어야 한다고 착각한 건 오로지 내 바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바람'.
그 바람을 인생이 들어주지 않았다고 배신자 취급하고,
피해자인 양, 사람들을 모아 인생을 호도한 건
인생 입장에서 보면 무척 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더러운 똥을 손에 묻힐 용기
더러운 인생이라며, 인생을 부정해 왔다.
그걸로 실패의 부끄러움을 덜 수는 있었지만
인생을 내 편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인생이 더럽다는 것은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특별히 나에게만 못되게 구는 것은 아니니
누구에게나 가혹한 게 인생의 본성일지도.
그러니 인생을 내가 오해했었다.
원래 인생은 친절보다는 가혹한 것이었다.
가혹한 인생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더럽다며 피하는 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러운 똥을 직접 손에 묻힐 용기가 필요하다.
인생은 여러 방법으로 잔인하게 나를 테스트할 것이다.
진정 같은 편이 될 자격이 있는지를 말이다.
이제는 인생이 주는 시련을 같은 편이 되기 위한 테스트로 여길 참이다.
같은 편이 되고 싶은 것은 나의 바람이지, 인생은 사실 별 관심이 없다.
인생의 가혹한 테스트에 또 상처를 입고, 비슷하게 상처입은 무리들과 한 편이 돼서 또 한번 인생을 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날 욕하는 이들과 같은 편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