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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슈어 Sep 17. 2023

'공감 품앗이' 회원 모집합니다

공감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ep5

 오랜만에 홍대 근처에서 모임이 있던 금요일 저녁이었다. '역시 젊음의 거리인가' 9번 출구를 나서자 느껴지는 충만한 에너지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어딜 가나 꽉꽉 차있는 사람들과 왁자지껄한 소음 때문에 불편하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설렘이 느껴진다. 역시 홍대는 그런 매력이 있다.


 겨우 자리가 난 곳을 찾아 테이블을 잡았다. 옆 테이블과의 거리도 가까운 데다 저마다 목청을 높여 이야기를 하니, 내가 누구와 자리를 하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다. 옆 테이블의 젊은이들은 무슨 일로 저렇게 핏대를 세워가며 이야기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귀에 와서 박힌다. 


너 T야??


 "얘는 뭐 기자도 아니고 팩트체크를 해?ㅋㅋ" 약간의 조롱이 섞인 경고가 상대에게 꽂힌다. 아! 그렇다! 현대 사회에 살면서 공감은 미덕이자 매너이다. 한 친구가 눈치 없이 전후 관계를 궁금해하거나 맥락을 파악하려는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다. 기분이 상한 친구가 잔뜩 눈썹을 구기고는 "너,, T야?"라며 눈치 챙기라는 간결하고 분명한 경고장을 날린다.


 사실 공감이란 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상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적절한 추임새와 함께 기왕이면 속 시원하게 욕도 함께 섞어주면 그만이다. 다행히 옆 테이블의 T친구는 첫 경고에 눈치를 챙겼는지 그 이후 평화로운 공감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니까~맞아 맞아!, 미친 거 아냐?" 적절한 추임새가 대화의 흥을 돋운다. 대화에 참여하는 모두가 행복해지고, 커지는 목소리만큼이나 금요일 밤의 흥겨움도 깊어간다. 


이건 일종의 품앗이다. 공감 품앗이. 


 내가 맞장구 쳐준 만큼, 나도 돌려받는다. 룰은 간단하다. 이 간단한 룰을 어기면 다음 모임엔 참여하기 어렵다. 모임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대화는 점점 더 잘 통하고, 유대는 깊어진다. 여러 번의 모임을 통해 걸러질 사람은 걸러지고 남은 정예의 멤버들인 셈이다. 


 나 또한 공감 품앗이의 열렬한 회원이었다. 회원관리를 위해 태도가 불성실한 멤버들은 가차없이 방출했다. '걔랑은 말이 좀 안 통하더라고' 어느새 나의 세상은 이들과 이들이 아닌 세상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정상적인 이들과 함께 비정상적인 세상을 걱정할 때면 카타르시스 같은 게 느껴졌다. 내가 정상이라는 희열과 함께 우월감같은 것이 생긴다. 이들과의 유대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카톡창에 새로 생긴 빨간색 알람이 무척 반가웠다. 별 의미도 없고 시시껄렁한 농담이 가득한 카톡방이지만 나에겐 안락함을 주는 세상이었다. 내 세상은 점점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러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품앗이를 떠나보낸 말 안 통하던 이들에게서 문득 '부러움'을 느끼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자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당당'해 보였다. 흠,,, 자존감이 뿜뿜 하고, 앞장서서 누군가를 리드하는 종류의 당당함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강'과 닮은 당당함이랄까? 누군가 돌을 던져도, 뛰어들어와 요란하게 물장구를 쳐도, 그러다 훌쩍 떠나가도,  강은 개의치 않고 그저 흐르던 대로 흐를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속도 그대로, 흐르던 방향 그대로 갈길을 간다. 그런 종류의 당당함이었다. 그 모습이 무척 자유로워 보였다.


단단하게 구축한 내 세상에 균열이 생겼다. 


 내 세상은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 좁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고립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자발적 고립. 내 세상 안에 나를 스스로 가두고, 좁디좁은 그곳에서 몇 되지 않는 소수의 관계와 함께 나만의 (개똥) 정의를 만들었다. 그 세상이 진짜 세상인 줄 알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혼자 세상을 왕따 시킨다는 우스갯소리가 실제로 가능했다.


 종종 뉴스를 통해 oo갤러리, oo카페 같은 폐쇄적인 성격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들어본 적 있다. 가히 엽기적이라고 할만한 대화들이 거리낌 없이 유통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충격적인지 알지 못한다. 알 생각도 없는 듯하다. 영웅심리에 취한 몇몇은 그것이 마치 무슨 정의로운 '사회운동'인양 사회밖으로 표출한다. 실제로 그들 커뮤니티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다. 마치 박해받는 선교자라도 된 것 같은 표정으로 폴리스 라인에 서서 내려다보는 눈빛은 기가 차면서도 섬뜩하다.


 내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모인 폐쇄적인 공간은 이런 식으로 위험성을 내포한다. 그들만의 세상 안에, 그들만의 언어와 철학, 정의가 구축된다.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떠나기도, 내쫓기도 해서 내부 결속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 수위는 한계를 모른다. 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그들만의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나의 공감 품앗이가 그들의 것과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단단하게 구축하려던 내 세상을 흘려보내기로 한다

 나의 세상을 단단하게 구축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내가 맞고 남들은 틀렸다' 이를 증명하고 확인받고 싶었다. 그것이 내 삶의 정의이고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인생관이 단단하게 구축될수록 내 삶도, 내 미래도 탄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단단한 삶을 구축하는데 쓰는 에너지는 아집을 낳았고, 합리화를 생성했다. 시야를 좁게 했고, 인간관계를 한정했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나의 미성숙함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를 감추고 확인받는데 들였던 노력은 내 삶을 단단하게 하는 듯 보였으나. 그렇게 단단해진 세상은 부서지기도 쉬웠다.


 강같이 흘러가는 이들의 세상이 부러워 보였던 것은 그러한 이유였을까? 그들의 삶은 부서지는 법이 없었다. '내가 틀린 게 아니야!'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았다. 바위를 만나면 비켜가고, 길이 없으면 돌아간다. 그러나 결코 원래 가던 방향을 거스르는 법이 없다. 그들의 삶이 자유로우면서도 당당해 보이는 이유였다. 


 이제 '품앗이'를 탈퇴하려 한다. 타인의 공감으로 인해 내 삶이 인정받는다는 착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오늘부터 내 삶은 가려던 길을 가는 강처럼 흐를 뿐이다. 유연하고 당당한 강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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