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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치 Jun 02. 2020

즐거움은 언제나 괴로움과 함께 합니다.

괴롭지 않은 것이 행복입니다.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다. 어떤 노인네의 이야기인데 키우던 말 한 마리가 집을 나갔는데도 슬퍼하지 않고, 그 말이 애인 말을 한 마리 더 데리고 돌아왔는데도 기뻐하지 않았다. 자식이 다쳤는데도 슬퍼하지 않고, 다쳤기 때문에 전쟁통에 끌려가지 않았는데도 기뻐하지 않았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노인네다. 이렇게 살면 정말 재미없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기뻐할 줄도 알고, 슬퍼하기도 하면서 성장하는 것 아닌가. 인생이란 그런 것 아닌가. 괴로움의 관점에서 보면 이 노인네의 태도는 행복이다. 이 노인네는 슬프지도 않은데 즐겁지도 않으면서 행복하다. 조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사실이다.


즐거움에는 언제나 괴로움이 따라온다. 즐거움은 기분이 좋을 뿐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다시 가라앉게 되어있다. 신체적으로 보면 즐거움을 유발하는 호르몬이 있다. 그래서 이 호르몬이 나오면 즐거워진다. 마약이 그렇다. 즐거움을 유발하는 호르몬이 잔뜩 분비되도록 만든다. 그래서 한도 끝도 없이 즐거워진다. 문제는 이 호르몬의 양이 줄어들 때 사람은 괴로워진다. 그러니까 호르몬 양이 늘어나는 상태라면 즐거운데 줄어드는 상태라면 괴롭다. 신기한 것은 사람이 항상 즐거움을 느끼는 호르몬을 내보내지 않는다. 너무 오래 계속해서 증가하는 호르몬 양이 늘어난다면 신체에 무리가 가고, 뇌가 맛이 간다. 그래서 즐거움을 유발하는 호르몬은 나오다가 만다.


이렇게 호르몬 분비량이 줄어드는 작용이 고장난 사람이 조증이다. 마약중독자는 계속해서 이 호르몬을 만끽하고 싶기 때문에 더 마약을 원한다. 증가하는 상태에서 즐거움이 나오기 때문에 1에서 2로, 1만큼 늘어나며 즐거움을 느꼈다면 다음은 2에서 4로, 2만큼 늘어나야 즐거움을 느낀다. 이게 중독이다. 몸과 뇌는 온통 망가져버린다. 마약중독자들은 마약을 하지 않을 때 엄청난 공포, 허무감, 즉 괴로움을 느낀다. 마약으로 엄청나게 늘어난 호르몬 양이 엄청나게 줄어드는 만큼 괴로워지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보면, 호르몬을 보면 즐거움에 괴로움이 함께 오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다. 사람 몸이 그렇게 돼있다. 그런데 ‘괴로움 보고서 글에서도 확인할  있다. 괴로움은 3가지에서 온다고 했다.

좋은 것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안 될 때
싫은 것에서 떨어지고 싶은데 안 될 때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을 때

이 세 가지 경우에서 괴로움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즐겁다면 그 상태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고, 즐거움을 계속 잡고 싶은데 안 되니까 괴롭다. 사람이 무한히 즐거울 수 없다. 어떤 즐거움이든 끝이 있다. 질리기도 하고, 익숙해지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 이유로 한 번 즐거웠던 일이 계속 즐겁지 않다. 그런데 이걸 계속 잡고 싶은데 안 돼서 괴로워진다. 그리고 이 아쉬움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안 되니까 또 괴로움이 온다. 즐거웠던 일을 계속 떠올리면서 또 하고 싶은데 안 되면 또 괴롭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한다면, 괴로움 뒤에도 즐거움이 올까. 새옹지마의 노인네 이야기에서는 드라마 같이 전쟁이 터지고, 말이 돌아오고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걸 찾기는 어렵다. 그래서 괴로움에 즐거움이 온다는 것도 생각하기 힘들다. 이것도 신체적으로 볼 수 있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이 있다. 괴로움을 가져오는 호르몬이다. 이 호르몬이 분비 되면 괴로워진다. 그러나 이 호르몬의 분비량이 줄어들면 짜릿한 즐거움이 찾아온다. 즐거움을 유발하는 호르몬과 마찬가지로 괴로움을 유발하는 호르몬이 증가하는 상태라면 괴롭고, 감소하는 상태라면 즐겁다. 아주 고된 일에서 벗어날 때 기분이 고양된다. 괴로움이 탁 끝날 때 감정은 끝도 없이 올라간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 한다는 것은 이것들이 기분일 뿐이라는 뜻이다. 호르몬 이야기는 이제 잊어버려도 상관없다. 즐거움에는 괴로움이 따라오고, 괴로움에는 즐거움이 있다. 서로 같이 다닌다. 기분이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고 나쁘고는 사실 나랑은 큰 상관이 없다. 그냥 기분이 그럴 뿐이다. 기분은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마음을 바다에 비유한다. 기분은 파도와 같다. 아주 뻔하고 흔한 비유이지만 가장 정확한다. 파도 하나 일었을 뿐이고, 다시 사라질 것이 뻔한데 파도 하나 생겼다고 마음을 빼앗기고, 그 파도가 사라졌다고 슬퍼할 이유가 없다. 그냥 일었다가 사라지는 파도처럼 기분도 일었다가 사라진다.


괴로움은 이 파도를 계속 떠올리기 때문에 생긴다. 기분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져버리는데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계속 사라진 흔적을 보고, 마음속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나쁜 기분이었더라도 지나갈 것이고, 좋은 기분이었더라도 지나갈 것인데 계속 괴로워하고, 계속 좋고 싶은 것이 자기의 습관이다. 그렇게 습관이 들어 버린 것이다.


기분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파도가 생겼다고 바다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면 그냥 보면 된다.

기분이 좋다면 ‘아 내가 지금 기분이 좋구나’ 하면 되고, 기분이 안 좋다면 ‘아 내가 지금 기분이 안 좋구나’ 하면 된다. 기분은 괴로움과 아무 관련이 없다. 이렇게 가만히 보지 않고, 빠져들고, 휘둘리고, 붙잡으면서 괴로움이 생긴다. 그저 일었다 사라지는 기분을 두고 내가 괴롭다고 정한다.


그래서 즐거움은 행복이 아니고, 슬픔/분노/억울함 같은 건 불행이 아니다. 그때 기분이 그렇게 일어났을 뿐이다. 파도를 보듯이 ‘내가 지금 기분이 이렇구나’ 하고 사라지는 걸 보면 된다. 그러나 사람이 기분에 빠져들지 않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기분이 좋은데 마냥 좋아하지 않는 것도 어렵고, 기분이 안 좋은데 가만히 보고 있는 것도 어렵다. 그래서 바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본다는 것은 실제를 직시한다는 것이다. 착각이나 허황된 망상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기분이 나를 괴롭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기분이 들어서 괴롭다는 착각이다. 기분이 들었다는 것과 나는 별개다.


그렇다면 기분은 그러한데 행복은 무엇일까.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바로 행복이다. 행복에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가능하지 않다. 어떤 기준으로 행복을 정할까. 사람마다 다르고, 기준을 충족하면 또 행복하지 않은 상태가 된다. 뻔한 소리 같지만 보통 이야기 하는 행복의 기준, 돈/직업/명예/가족 같은 것은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행복을 정하려다 보면 반드시 괴로움이 있다. 그렇다고 이러한 일들로 돈, 원하는 직업, 명예, 가족 같은 것들을 등한시 할 필요도 없다. 행복과 별개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가져올 가능성이 크지만 동시에 괴로움이 안 올 가능성도 크다.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다.


행복은 기분과 관련 없다. 여러 상황과 자기의 조건과도 상관 없다. 괴롭지 않으면 행복이다. 아프지 않으면 건강하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편안하듯이 괴로움이 없으면 행복하다. 그리고 이것은 즐거움과 관련이 없다. 즐거움은 괴로움과 함께 한다. 지금 괴롭지 않다면, 괴로운 생각이 없다면 ‘나는 행복하다’라고 하면 된다. 그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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