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꿈
한 땐 내가 가진 목표를 우습게 아는 사람들이 싫었다.
그러다 그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꼼짝 못 하는 사람들이란 걸 알고 이해했다.
그 목표에 덧대고 덧댄 상상을 하다 보면, 그게 꿈이 된다.
(그 역시 한땐 직업적 목표와 꿈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참으로 융통성이 생겼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20살의 내 꿈을 비웃던 사람, 30살의 내 꿈을 비웃던 사람과 현재의 나를 비웃는 사람.
그 역시 여전히 존재한다.
보통 사람들은,
함께 걷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다.
설명해도 믿지 않는다.
이뤄낸 걸 보고도 믿지 않는다.
결국 아무도 믿지 않게 된다.
입력->출력되는 세상이면 얼마나 편하겠냐만, 편하지 않음의 소중함이 지켜주는 가치.
이건 해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소중한 가치.
타인을 나의 꿈에 감화시켜 같은 방향으로 가도록 한다.
가끔 사장은 느낀다.
저 사람, 놓을 타이밍을 보고 있는 건가.
손을 놓을 이유는 복합적일 텐데, 끝내 나에게서 이유를 찾을 건가.
손을 놓겠다는 판단을 한 사람에게 내밀어 줄 손은 없다.
그저 내 손을 잡겠다는 사람에게 손을 뻗을 뿐이다.
그 마음의 확신까지 내게서 찾을 텐가.
나는 그가 내 곁에서 몇 번 주저앉았는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설명하고 보상하라고 설득하지 않겠다.
내가 주저앉았을 때 옆에 있지 않겠다는 사람에겐, 내 꿈을 설득할 여유가 없다는 걸 모르는 것이고,
그만한 신뢰를 내가 쌓지 못한 걸 테니.
별 수 없다.
나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단지 남들이 달려 간다고 나도 달려가서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혼자 갈 수 없는 일이라 함께 가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혼자 갈 수 없는 길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떤 판단엔 복합적 구성이 존재한다.
그 면과 선에서 중요하게 느끼는 본인에게 중요한 가치와 기준이 존재하길 바란다.
그 기준에 우리가 맞지 않는다면 우리는 훌훌 털어내야 한다.
나를 지키지 않으면 해낼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한다.
나는 나의 속도로 걸어야 한다.
누군가 내게 뛰지 않는다고 타박할 때가 있다.
가끔 트랙 위의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자신이 트랙 위에 있는 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자갈이 잔뜩 있는 오솔길을 걷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잘 깔린 길을 뛰어본 사람처럼 뛰라고 말하는 건, 통찰이 부족하다.
언젠가 길 위에 아스팔트가 나오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길은 아마, 자기가 할 만큼 하고도 아스팔트를 깔아도 될 수준인 사람들이 깔아놓은 길일 거다.
그런 길에선 뛰어야 살 수 있다.
내가 그 길을 놓친다면, 아마 깔려 죽을 테다.
나는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저 내가 목표한 걸 발견할 때까지 걸어갈 뿐이다.
내가 가진 소중한 능력은, 그 발자국에서 좀 더 목표에 가까운 길을 발견하고, 시도하는 능력뿐이다.
내 판단을 믿지 못한다면, 언제든 그 손을 놓아야 한다.
혼란에 빠진 채 부여잡기엔 본인의 인생이 아깝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시간을 눌러 담아 초연하게 사용하고 있다면,
그가 어금니를 가장 꽉 문 사람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