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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Jun 24. 2023

06. 체육의 역사

공부만 잘하면 되지 도대체 왜 체육까지

입학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면접과 체력검사. ‘지덕체’가 아닌 ‘체덕지’를 강조하기로 유명한 이 학교는, 체력검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면접을 아무리 잘 봐도 사실상 탈락이었다. 체력검사는 두 가지였는데, 여학생 기준으로 1분 내 윗몸일으키기 15개와 13분 내 1600m 달리기 완주를 성공해야 했다.


사실 면접보다 체력검사가 더 걱정이었다. 그도 그럴게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엄청난 몸치이자 저질체력으로 유명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저체력 판정을 받았고, 생활기록부에 신체 활동을 ‘제한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2학년 때는 앞 구르기와 뒷구르기를 끝내 성공하지 못해서 60점대의 체육 점수로 전교에 몇 없는 B 등급을 받은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가 바로 나였다.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모두가 수행평가를 끝내고 휴식을 취할 때에도 나는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구르기가 그렇게도 안 되냐며 체육 선생님께서는 늘 나를 안타까워하셨다.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는 학기 초부터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딱 80점만 넘겨서 어떻게든 A 등급을 받아보자고, 될 때까지 한 번 해보자고.


친한 친구들 중 체육에 뛰어난 친구들이 꽤 여럿 있었다. 체육 시간에 자유 시간이 주어지면, 친구들은 파란 하늘 위로 공을 주고받으며 시원하게 달렸다. 공을 쫓아가며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그 모습이 참 좋았다. 여름에도 손발이 차가운 나는 친구들이 벗어주고 간 겉옷을 덮고 매트 위에 앉아 있다가, 친구들이 내게 달려오면 차가운 손으로 ‘인간 쿨팩’ 역할을 톡톡히 했다.


수행평가 종목이 처음 나오던 날,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친구들은 평소에도 방과 후에 체육관에 남아 운동 동아리 활동을 했기 때문에, 내가 구석에서 연습하고 있으면 짬짬이 자세를 봐주고 조언을 해 주었다.


그때가 중학교 3년 중 내가 거의 유일하게 누군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던 때이다. 나는 그저 못 하는 건 못 하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체육에 있어서 나는 내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고, 그에 맞는 정당한 결과가 나온 거니까 딱히 속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구들은 그런 부분을 귀여워해주기도 했다. 어차피 2학년 때는 일반고에 갈 생각이었기에 체육 점수에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체육점수가 중요해지고 절박해지자 나는 결국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부담감과 미안함이 잔뜩 묻어난 차가운 손을 친구들은 거리낌 없이 잡고 끌어당겨 주었다.


3학년 때 결국 1, 2학기 모두 80점을 넉넉하게 넘는 점수로 A 등급을 받아냈다. 모두가 그늘에서 쉬던, 최고 기온이 30도는 우습게 넘어가는 뜨거운 한낮의 여름날에, 내가 던진 공을 끊임없이 다시 주워다 주던 친구들 덕분에. 그건 내 체육의 역사에 있어 처음으로 얻어낸 성취였다.


체력 시험 종목인 윗몸일으키기와 오래 달리기는 말 그대로 ‘체력’의 문제였기에, 내 힘으로 극복해야 하는 영역이었다. 2월 즈음에 처음으로 윗몸일으키기를 시도해 보았다. 말 그대로 ‘시도‘만. 왜냐하면 나는 그날 끝끝내 상체를 한번도 일으키지 못했으니까. 한 개는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예 못 할 수도 있구나. 스스로의 뻣뻣한 신체에 다시 한 번 감탄하던 날이었다.


집 근처 공원에서 달리기도 연습해 보았다. 13분 안에 완주하는 건 고사하고 나는 1600m를 다 달리는 것조차 버거웠다. 날은 추운데 계속해서 땀이 나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 이후로 그저 꾸준히 조금씩 계속했다. 특별한 요령은 없었다.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공원을 달리고, 매일매일 자기 전 윗몸일으키기를 하고. 윗몸일으키기는 약 200일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다섯 개, 다섯 개씩 일주일 했으면 그다음에는 여섯 개, 여섯 개씩 또다시 일주일. 조금씩 늘려나가다 보니 나중에는 15개 정도는 30초면 쉽게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 달리기는 처음에는 시간제한 없이 1600m를 다 달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 이후부터는 얼마나 걸리나 시간을 쟀다. 처음에는 20분이 족히 넘어갔지만, 미묘하게 몇 초씩이라도 기록은 조금씩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12월 말, 면접 직전에는 12분에서 14분 사이에서 당일 컨디션에 따라 조금씩 기록이 바뀌었다. 영 불안했지만 당일에는 긴장감 때문에라도 13분 이내로 들어올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나 면접에서 떨어지더라도, 체력 검사만 통과하면 진짜 행복할 것 같아. 정말로.


그 당시의 가장 자주 되풀이하던 이 말은, 내가 한 그 어느 말보다 진심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중학교를 다시 찾았던 적이 한 번 있다. 오랜만에 다시 뵌 체육 선생님은 여전히 쾌활하셨고, 내가 학교에서 현대 무용을 배운다는 소식에 상당히 놀란 기색을 보이셨다.


현대무용을 한다고? 네가 하려면... 비상구 표지판 흉내내기, 이런 거 해야 되지 않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시다 비상구 표지를 발견하신 선생님께서는 익살스럽게 탈출 동작을 흉내 내셨다. 선생님 앞에서만 넉살이 좋아지는 나도, 그게 뭐냐며 동작을 따라 하며 웃었다.


그때 너 구르기 때문에 정말 고생했었지. 그걸 아직도 기억하세요? 그럼, 사실 교무실에도 소문이 자자했어.


그래도 3학년 때는 결국 A 받았잖아. 그러니까 현대무용이든 뭐든 잘 해낼 거야.


구르기만 빼고, 라고 꼭 덧붙이시는 선생님께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렸다. 구르기 성공하면 꼭 보여드리러 올게요. 그래그래, 은퇴하기 전에 꼭 와라. 선생님께서는 웃으시며 배웅해 주셨다.


고등학교에서도 여전히 내 신체 능력은 전교 꼴찌 수준이었다. 그래도 입학시험에 통과했다는 것, 남들보다 오래 걸렸지만 단 한 번이라도 내 신체 조건을 극복해 낸 것, 그것 만큼은 평생의 자랑거리로 남을 것이 확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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