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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May 23. 2023

05. 내향인으로 면접에서 살아남기

나의 진짜 얼굴은

내가 지원한 학교는 면접 시간이 한 명당 15분으로 꽤 긴 편이었다. 면접관 3명과 지원자 1명이 대면하는 3:1 압박 면접인 데다, 공격적인 꼬리 질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나는 평소에 말하는 것보다 듣는 걸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이지만, 의외로 면접이나 발표, 토론에 강했다. 중학교 교지부 면접에서 유일하게 장기자랑 없이 합격한 부원이었고, 학생회 면접에서도 선배님들이 나를 가장 뽑고 싶어 하셨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다만 이번 면접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는 그저 싹싹하고, 성실하고, 밝게 웃는 사람으로 보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 학교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자신감 있고 진취적인 인상도 남겨야 했다.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연출해야 하는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되뇌었던 말은 면접관을 ‘다시는 안 볼 사람이라고 생각하자’였다. 다시 만날 일 없으니까, 내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일 없으니까, 그러니까 눈 딱 감고 한 번만 해보자. 모의 면접 때마다 자아를 갈아 끼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초반에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전혀 확신이 없었다.


같은 학교에 지원하는 친구 중에 목소리가 작지만 또랑또랑하고,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예쁜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 친구의 어조를 좋아했지만,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목소리를 키우라고 매시간마다 조언하시던 선생님은 결국 한숨 섞인 어조로 나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하면 면접관한테 들리기나 할 거 같아? 쟤 같은 애가 바로 앞 순서로 들어와서 한바탕 휩쓸고 가면 너는 기억에 남지도 않아.


그때 과연 내가 느낀 감정은 뭐였을까?

완전하게 기뻐하지도, 그렇다고 완전하게 불편해하지도 못했다.

그런 비교의 말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말에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의 성취를 처음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선 그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졌다.

사실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점점 지적을 받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후반부에는 아예 고칠 게 없다고 말씀하셨다. 오죽하면 너무 자신감 있으면 답변을 다 외운 것 같아 보이니 대답 전에 1-2초 정도 뜸을 들이라는 피드백을 받을 정도였다. 한창 신소재에 재미를 붙여가던 내 머릿속에는 대답할 소재가 무궁무진했고, 그 정보들을 문장으로 엮어 입 밖으로 꺼내는 것에 점점 능숙해졌다.


평소에 잘 웃는 성격인 것도 꽤 도움이 됐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15분 내내 생글생글 웃는지 참 신기하다고 하시며, 이 점이 면접관에게도 인상적일 것 같다고 하셨다. 미소도 하나의 전략으로 탈바꿈되자 이제는 내가 무의식 중에 웃는 건지, 의도적으로 웃는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입시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자 선생님이 아닌, 처음 보는 분들과 모의 면접을 할 기회가 생겼다. 모두의 차례가 끝나고 나서 그분들은 공개적으로 한 명씩 피드백을 해주셨다. 선생님께서 평소에 말씀해 주시던 내용보다 훨씬 직설적이고 날카로웠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을 때,


학생은... 그냥 너무 좋았어요.
정말, 너무 좋았어요. 뭐라 지적할 만한 점이....


순간 감돌던 침묵을 깬 건 선생님이셨다.


아니, 네가 그렇게 말해주는 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야. 오히려 지적을 많이 해 줘야 발전을 하지. 이제 실전 면접도 얼마 안 남았는데.


그 말에 면접관 분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하셨다.


근데 정말 고칠 점이 없어요. 제가 면접관이었다면 당장 뽑았을 것 같아요.


결국 선생님께서 황당한 표정으로 “너 쟤한테 반했니?”라고 농담 섞인 한 마디를 던지시고, 다 같이 한바탕 웃은 뒤에야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나도 함께 웃었다. 내가 아닌 내가 받는 칭찬에 내심 기뻐하며.


크리스마스날이 우리의 마지막 수업이었다. 그날 나의 마지막 면접에서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은,

너는 이대로만 하면 무조건 합격이야.


아, 이젠 모르겠다. 솔직하지 못한 모습을 꾸며내서 칭찬을 받는 것도, 그 칭찬 밑에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혀 있는 것도. 모의 면접에서 받는 칭찬마다 나는 늘 깔끔하지 못한 기분으로 웃었다. 그래도 합격하면 정말, 아무런 잡생각 없이 후련하게 웃을 수 있겠지.


그날 선생님께 크리스마스 선물로 쿠키를 드렸다. 지금 돌아보면 아무래도 입시 학원이라 나와 선생님은 일반적인 사제 관계보다 비즈니스적인 감정이 많이 포함된 사이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면접으로 연기하고 있는, 자신감 넘치고 야망 있는 성격을 본래 가지고 계신 선생님을 많이 동경하고 좋아했다.


아니, 그게 선생님의 원래 성격이라고 생각한 건 어쩌면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선생님께서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지으셨으니까. 뜻밖의 놀라움과 감동이 뒤섞인 표정을.


그때가 나도, 선생님도 자신의 본얼굴을 드러낸 유일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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