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마음

내가 기억하는 다정은

by 레톤

1.

십 대 시절 내내 교과목 중 체육을 가장 싫어하는 학생이었다. 예방 접종을 맞았다는 핑계로 체육시간에 빠지려고 접종일을 조정할 정도로. 체육 수업이 화요일이랑 목요일이고, 접종 후에 사흘 정도 쉬어야 되니까, 월요일에 주사를 맞아야 이틀 다 빠질 수 있겠다. 당시의 수업은 배구 경기 연습이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었다. 왜 모두가 하는 걸 나만 못하지. 왜 내가 보내는 공은 늘 네트를 넘지 못하고, 나에게 오는 공은 절대로 상대에게 되돌아가지 못하지. 그것도 아주 꾸준하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남들보다 두세 배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워서 이제는 이렇게 피해 다니기만 하잖아.


팔 속으로 들어온 액체가 꿈틀대는 듯한 욱신거림이 즐거웠던 것도, 1교시 수업이 체육인 아침을 개운하게 맞이했던 것도 그날의 화요일이 유일했을 것이다. 접종을 맞은 후에 약간의 으슬으슬함과 근육통은 있었지만 컨디션이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생님께 왼팔의 통증을 호소하는 건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지만, 구석에 등을 기대고 앉아만 있을 수 있는 두 시간이 참 편안했다. 내가 아는 얼굴들로 구성된 배구 경기를 구경만 하는 건 즐거웠고, 굴러오는 공을 이따금씩 되돌려주는 나에게 친구들은 오며 가며 괜찮냐는 걱정 인사를 한 번씩 건넸다.


우리 팀이 경기를 앞둔 시점에 친구 한 명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조원들을 모두 내 주변으로 불러왔다.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 둥글게 서서 전술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누가 서브를 하고 누가 토스를 하고, 시계방향으로 포지션이 바뀌니까 누구의 옆에는 누구를 세우고. 그날의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이자 내가 조금의 도움도 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끼워주려던 그 다정함이 가끔씩 떠오른다. 사실 난 외롭지 않았고 심심하지 않았는데.


2.

아무도 모를 비밀 한 가지를 털어놓자면 내 발은 엄지발가락이 검지발가락 쪽으로 조금 휘어져 있다. 이 문장에 '조금'이라는 부사가 붙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우리 엄마의 이른 걱정 덕분이었다. 내가 운동화나 구두 말고는 무슨 신발이 있는지, 메리제인이 뭐고 스틸레토가 뭔지도 모를 초등학생 때부터 엄마는 내 발을 걱정했다. 아무래도 무지외반증 같은데, 저대로 뼈가 더 튀어나오면 어떡하지. 예전에 알던 분이 증상이 똑같았는데, 뼈가 눌려서 아프다고 운동화랑 플랫 구두만 신고 다니셨거든. 우리 딸도 나중에 신고 싶은 신발들 마음껏 못 신게 되면 어떡해.


고민 끝에 엄마가 구입한 건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발가락 교정기였다.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의 거리를 벌려두는, 새끼손가락 정도 길이의 교정기였는데, 착용감이 딱히 거슬리지 않아서 잠들기 전에 꼬박꼬박 발가락 사이에 끼워두곤 했다. 지금도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휴일에는 가끔씩 습관적으로 착용한다.


다행히도 엄지발가락이 더 휘어지기 전에 성장기가 먼저 끝났다. 일반적인 발에 비해서는 뼈가 도드라진 모양이지만 신고 싶은 신발들은 전부 다 신고 다닌다. 단단한 가죽의 워커도 얄쌍한 모양의 운동화도 길들이기 어렵기로 유명한 통굽 샌들도 전부 다. 유독 살이 붙지 않아서 핏줄이 다 드러나 보이는 데다, 왼쪽 검지 발가락이 신발에 자꾸만 부딪혀 늘 멍들어 있는데도, 미적으로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내 발을 나는 콤플렉스로 여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름에는 양말로 감추지 않은 맨발을 마음껏 샌들 위로 드러내놓고 다닌다.


3.

앞서다

앞에 서다

동작 따위가 먼저 이루어지다

앞에 있는 것을 지나쳐 가다


앞선 마음들은 이따금씩 나보다 먼저 미래에 도착해

나보다 먼저 나를 살펴봐준다.

내가 나를 싫어하게 될 순간들을 지나쳐 가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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