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 대해 말하자면
스무 살에 짧게 만났던 남자친구와 만화카페에 간 적이 있다. 유치원생 이후로는 만화를 본 적이 없기에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매사에 별 의욕이 없던 나 대신 남자친구가 데이트 코스를 전적으로 짜 주고 있었기에 군소리를 더하기도 민망했다. 뭘 읽어야 하나 고민하던 끝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만화책의 제목을 떠올려냈다. 열다섯 살 때 친해진 친구가 열여덟 살 때 추천해 준 만화책. 은연중에 내 발길은 그 책을 찾아 헤맸고, 내 눈높이보다 조금 위쪽에 일렬로 꽂힌 모습을 발견했다.
내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의 절반에는 그 친구가 녹아있다. 입시로 한창 바쁠 때는 하루에 한 번씩만 서로 할 말을 우당탕 남겨두었는데, 메시지 알림이 180개씩 울리곤 했다. 전하고 싶은 말이 뭐 그리도 많았는지. 하나하나 답장하다 보면 두 시간쯤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제는 예전만큼 연락을 자주 주고받지 않는다. 그 애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나에게 없는 선택지이지만 자주 만나지 않는 건 충분히 가능한 선택지였다. 내 안에서 절대로 부피가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지. 이유가 뭐였더라. 짧은 회상에 잠겨있다 보니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남자친구는 내가 발꿈치를 살짝 든 채 손끝으로 훑던 그 만화책을 유유히 대신 꺼내주었다. 너무 흔한 클리셰 같은 장면이 결국 내 연애에도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스웠다. 어쩐지 나는 이건 사랑이 아니라 연애라고 자꾸만 선을 긋게 되었다.
그는 표지를 대강 훑어보며 말했다. 완전 순정만화 느낌이네. 이런 건 별로 취향에 안 맞지? 그때 나는 순간 숨을 삼긴 채 응, 그렇지, 라고 대충 대답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딱히 읽을 만한 게 없네. 그냥 영화나 보자.
왜 그때 나는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을까? 그건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친구가 추천해 줬던 책이라고. 그래서 한 번 읽어보고 싶다고 말해도 괜찮았을 텐데.
남자친구는 맑고 다정하고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를 잘 이해하는 것 같다고 느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보는 내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은 그즈음에 했던 것 같다.
올해 초에 드디어 그 만화책을 읽었다. 세 시에 수업이 끝나던 화요일에 학교 근처 만화 카페로 혼자서 발을 디뎠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 아르바이트 시간 전까지 책장을 넘기다 보니 단숨에 세 권을 연이어 읽었다. 뭐지. 기대보다 너무 재밌는데. 현실에 충분히 있을 법하지만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그런 고등학생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등장인물 모두에게 나의 일부가 묻어있다고 느꼈다.
아마 나 스스로는 절대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 애의 안목을 믿었고 어김없이 좋았다. 돌이켜 보면 늘 그 애 덕분에 나의 세상이 넓어졌다. 서점에 가면 소설보다 시집을 먼저 둘러보는 것도, 일기장을 살 때 종이 질을 제일 먼저 살펴보는 것도 그 애에게서 배웠으니까. 상상해보지 못한 수많은 처음들 모두를.
흰색 블라우스에 회색 교복 치마를 입은 채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학창 시절, 주변에서는 우리가 꾸준히 친하게 지내는 게 신기하다고 자주 말했다. 나로 말하자면 정말이지 틀에 박힌 모범생에 불과했다. 반듯한 긴 생머리에 정갈한 차림새. 비속어 한 번 써본 적 없고 라면 하나 끓일 줄 모르게 곱게 자란 외동딸. 나는 그런 스스로가 너무나도 따분하고 시시했고, 반대로 내 친구는 손끝까지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아직도 그 애가 축제 공연에 올랐던 날을 기억한다. 현대무용을 해보고 싶다며 혼자서 안무를 끄적이다가, 두 눈을 천으로 가린 채 무대 위에서 하늘하늘 떠 다니던 그날을. 반짝인다기보다는 하나의 둥근 빛을 뿜어내는 듯한 아우라가 있었다. 그 빛을 머금은 채 무대에서 내려와 어김없이 나에게 제일 먼저 달려오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저렇게 멋있는 애가 어째서 나와 친구일까 하는 칙칙한 생각을.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 애가 나만 보면 깔깔 웃던 것만이 선명하다. 살면서 그토록 나를 재미있어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힘없이 휘청휘청 걸어 다니던 발걸음도 편식이 심해서 수북이 남기던 급식도 나에게는 숨기고 싶은 것 투성이었는데, 그 애는 하나하나 즐거워했다. 우리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조용하긴 해도 얌전하지는 않은 성격 정도였다. 가끔 세상을 정말이지 예쁘게 보기 힘들 때 그 애에게만큼은 인류애 없는 표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다. 운동장에 사람 너무 바글거리는데, 인구수가 절반으로 줄어버렸으면 좋겠다. 꼭 내가 살아남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냥 무작위로 쓸어버렸으면. 그러게, 학교에 운석이나 떨어지면 좋겠어. 그냥 공룡이 와서 한 발자국 콱 밟아줘도 좋을 텐데.
주말에는 뭐 할까. 한강에 자전거 타러 갈래?
나 자전거 못 타. 열한 살 때 배우다 왼쪽 다리에 멍만 가득히 들고 포기했어. 네발 자전거는 탈 수 있긴 해.
그럼 수영 같이 배울래? 관심 생겨서 알아보던 중인데.
나 물에 아예 뜨지도 못해. 킥판 잡고도 가라앉는 사람 본 적 있어? 그게 나야.
세연아, 진짜 너는 공부를 잘해서 다행이야. 공부를 많이 잘해서 정말 다행이야...
나는 공부 말고는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거의 없었다. 성격은 또 어찌나 예민하고 겁이 많은지. 특히 물은 오래도록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면 어쩐지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온 기분이었고 나는 호흡이 어려운 상황을 찰나조차 버티지 못했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숨 쉴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수영 수업에서 킥판을 붙잡고서도 물에 가라앉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제발 킥판을 믿고 힘을 조금만 빼 보라는 강사님의 목소리가 매시간 귀를 울렸지만 그뿐이었다. 가라앉는 것도, 힘을 빼는 것도 두렵다면 떠오르지 못하고 걷는 수밖에.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비슷했다.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이면에 존재하는 반항심과 냉소를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 영역은 내가 한 번도 닿지 못했던 물속의 심연처럼 느껴졌다. 사실 나는 파괴적인 악기 소리를 좋아하고, 공부는 단 한 번도 좋아서 해본 적이 없고, 친구들 사이에서 웃으면서도 자주 혼자 있고 싶다는 것. 드러내서 딱히 좋을 것 없는 사소한 솔직함들. 수영을 못 하는 나는 영원토록 내 삶에 발만 담그고 살고 싶었어. 빠져 죽을 일 없이.
그런 내 발목을 처음으로 끌어당긴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애한테 열여덟 살에 보냈던 말이 있다. 내가 해변에 앉아 있으면 네가 내 등을 밀어서 바다에 빠지게 해 주는 기분이라고. 나는 수영하는 법도 잠수하는 법도 모르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물고기가 너무 예뻤다고. 아직도 이보다 그 애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 애의 바닷속을 들여다보는 게 고작이었다. 국적을 가리지 않던 음악 취향. 패턴이 화려하고 독특한 양말들. 크레파스로 그려낸 일그러진 얼굴. 시험 일주일 전에 노란 정사각형 포스트잇 위에 빨간 볼펜으로 장난 삼아 그려주던 부적들. 내가 보는 그 애는 무엇하나 평범한 것이 없었고 늘 새로웠다. 언젠가 그 애가 자신은 특별한 날이 아닌 아무 날에 잘해주고 싶다며 만년필을 사 준 적이 있는데, 딱 그 정도의 새로움이었다.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또 요즘 세상에 흔하지는 않으니까. 그 만년필로 일기장 두 권을 채울 만큼 시간이 지나도 그 애의 속은 훤히 들여다 보이지 않았다.
필명인 레톤도 그 애가 지어준 별명이다. 중학생 때 나는 꽤 많이 하얗고 마른 편이었고, 움직일 때마다 삐걱거렸는데 그게 과학실에 있는 인체모형이랑 닮았다면서. 처음에는 스켈레톤이라고 부르던 걸 나중에는 줄여서 레톤이라고 불렀다. 그 애의 휴대폰에는 내 이름 대신 스켈레톤 뒤에 셀 수 없이 많은 하트가 붙어 있었고 나는 그게 어이없으면서도 좋았다. 그래도 친구 별명을 해골바가지라고 지어준 건 좀 그런가. 그 애가 내 수학 문제집 위에 리본을 단 채 웃고 있는 해골 얼굴을 그리며 물었을 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난 좋아. 어감도 마음에 드는데. 단단하고 물기 없고 창백하고.
그리고 네가 지어준 거잖아. 이 말은 끝끝내 삼키고 말았지만 나는 내 이름 석 자보다 레톤이라는 별명을 좋아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이었고, 그 애가 보는 모습이 제일 나다우면서 동시에 마음에 들었다. 나는 나를 그다지 좋아한 적이 없기에 그 사실이 내내 신기했다. 그 애를 투과해서 보는 나는 조금쯤 견딜만하다는 것이.
그 애가 좋아서 계속계속 옆에 있었을 뿐인데, 희한하게도 그럴수록 그 애가 아닌 나에 대해서 더 알게 되었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추위를 많이 타서가 아니라 해를 오래 볼 수 있어서라는 것. 제일 좋아하는 색깔인 흰색에도 다양한 채도와 명도가 있고 그중에서도 나는 창백하도록 시린 하얀색이 좋다는 것. 같이 한여름에 온종일 동네를 걸어 다니며, 팬톤 컬러칩을 구경하며 알게 된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한 달에 한 번씩 기숙사에서 나오는 날이면 대부분 그 애를 만났다. 나는 내 일기장을 보여줬고 그 애는 자신의 스케줄러를 보여줬다. 그렇게 일상을 바꿔 읽다 보니 내 열여덟 번째 생일날에 나와 같이 듣고 싶다며 적어둔 노래 한 곡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곡을 계절이 두 번 지나고 나서야 줄 이어폰을 나눠 끼고 들었다. 우리는 봐줄 만한 실패작이고 어딘가 모자라는 성공작이지만, 우리 둘이 함께면 아무 문제없다는 가사와 함께.
언젠가 라디오에서 내가 평소 좋아하던 곡에 대한 해석을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사랑 이야기인 거죠, 어떻게 보면. 수족관 속 물고기들은 평생 바다를 몰랐으니 내가 그 바다로 데리고 가서 직접 들려주겠다, 보여주겠다 하는.
너를 만나기 전에는 아마 내가 그 물고기처럼 살아오지 않았을까? 누군가 담아다 준 안전하고 깨끗한 물만이 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면서. 네 덕분에 이제는 내 몫으로 주어진 바닷물에 발은 담그고 살아. 아주 가끔씩은 숨을 참고 짧게나마 잠수도 해보고, 그러다 물이 코에 들어가서 아파도 해보고, 그럼에도 타인의 바다를 들여다볼 용기도 조금씩 내 보고 있어. 네 바다는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푸르게 요동쳤고.
4월에 피는 델피늄
영화 <프렌치 디스패치>
바이레도 인플로레센스 향수
햇빛이 작열하는 유월
하현상의 곡 ‘a book of love'
심장 박동처럼 진동하는 드럼 소리
와플콘 위에 얹어진 민트 초콜릿맛 아이스크림
문지혁의 소설 ‘초급 한국어’
선물 받은 아이보리색 목도리
검지 손가락에 끼는 유기견 기부 반지
이 모든 것들을 모으면 지금의 나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 애와 거리감이 생긴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이 영화 너랑 분위기 비슷한 사람이 좋아하더라, 그래서 추천해주고 싶었어, 여전히 이런 연락은 종종 주고받지만 빈도가 잦지 않다. 그저 서로의 파도가 서로의 해변에 닿지 않는 날이 온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만년필에 잉크를 새로 채우다 문득 잉크의 이름을 사전에 검색해 보았다. 그 애가 일본 여행을 다녀오며 선물해 준 잉크. 일본어로 적혀 있어 사실 그동안 궁금해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tsuki-yo
달밤
그 아래에 적힌 예문은 '달밤의 산책'이었고 나는 왜인지 모르게 형용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 달밤이 어울리는 사람인가?
우리가 더 이상 일상을 공유하지 않기에 그 애는 자세히 알지 못할 나의 스무 살 연애사. 사실 상대를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도 같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글을 쓰느라 바쁜 내가 그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임시저장 글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친구에 대해서만 써도 이렇게 길어져 버리는데. 그래서 그날 만화카페에서 너에 대해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은 걸 후회해 본 적은 없어.
잠수하는 법을 처음 알려준 사람에게 갖는 그 감정은 유리잔에 담아두면 물처럼 부드럽고 투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