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되자 초록 진주알 같은 머루 송이가 단단해졌다. 스폰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보라 축제가 풍성하고 재밌으려면 스폰서가 있어야 해! 흥부네 버금가는 도서관 예산으로는 재미난 축제를 할 수 없어! 외국처럼 도서관에도 기부하는 문화가 활발하면 좋겠는데. 기업들의 메세나 사업을 도서관으로 끌어올 방법은 없을까?
머릿속에서 스폰서 생각이 맴돌던 때 친한 기자님이 취재차 근처에 왔다가 놀러 오셨다. 동네에 취재할 사람이 누가 있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새로 취임한 우리 동네 농협조합장님이란다. 농협과 도서관은 쉽사리 연결이 되지 않아 심드렁했는데 이 분의 이력에 귀가 번쩍 뜨였다. 청소 일부터 시작해서 조합장이 되셨다니 입지전적인 인물이 아닌가. 며칠 후 신문에서 본 조합장님 눈빛은 신문을 뚫고 나올 듯한 기세였다. 다부진 하관과 올라간 입꼬리에서 자신감과 온화함도 보였다. 그래, 이분이다! 그동안 사람들 만나서 일 벌이는 게 주특기였던 나에게 촉이 왔다. 게다가 우리 동네는 유명한 특산품인 쌀이 있다.
“조합장님 안녕하세요! 취임 축하드립니다!” “동네 도서관에 새로 온 관장입니다!” 도서관 행사에 쌀을 후원받을 수 있을까요? 시간 되실 때 찾아뵙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다음 날 조합장님이 도서관에 오셨다. ”우리가 후원할 곳인데 와봐야죠! “ 엉덩이가 이리도 가벼운 조합장님이라니! 도서관 구석구석을 둘러보신 조합장님이 후원을 허락하셨다. 나도 모르게 물개 박수가 나왔다. 나의 첫 스폰서, 도서관의 첫 스폰서가 생긴 기록적인 날이다. 내가 이 분 만나려고 승진을 해서 이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쌀은 보라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코스프레 경연대회 상품으로 쓰기로 했다.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덕후인 직원이 강력히 주장해서 열기로 한 코스프레 경연대회 덕분에 축제 준비가 더욱 신이 났다. 먼저 상 이름을 정했다. 대상은 ‘도서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보라상, 우수상은 ’기똥차고보라상‘, 장려상은 ’엉뚱발랄하고보라상‘, 참가상은 ’일단나오고보라상‘으로 정했다. 도서관 옆 초등학생들을 심사위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구제 거리에서 어렵게 구한 보라색 반짝이 뿔 모자를 쓰고 조합장님을 찾아갔다. 행사 계획서를 보여드리고 대상, 우수상, 장려상 수상자들에게 상품으로 줄 쌀을 부탁드렸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요? 헉! 당황스러운 마음을 감추고 물었다. “왜요?” “참가자 전원에게 주어야죠. 못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이게 바로 농부의 넉넉한 품인가? 내 눈은 하트 발사기로 변했다. 내친김에 조합장님을 축제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동네 신문에 보라 반짝이 뿔 모자를 쓴 홍보대사 사진이 커다랗게 실렸다. 시상식에는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오시겠다고 했다. 쌀 230kg을 짊어지고 축제에 나타나실 우리 동네 농부 산타를 상상하니 뭉클해졌다. 참으로 귀한 어른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