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박싱의 기쁨과 슬픔을 해치우고 나니 한 달이 훌쩍 흘렀다. 관장이 새로 와서 몰아치듯 도서관을 뒤집어놓자 다섯 명의 직원들의 얼굴에 걱정과 기대가 교차했다. 혼란스럽겠지. 나도 마찬가진 걸.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내가 만약 관장이 된다면 ‘의 가정법을 열심히 구동했어야 했지만 늦었다. 관장이 되고 보니 나 같은 직원 만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일 물어오는데 선수이고 한 번 꽂히면 관장의 말은 귓등으로 들었다. 다행히 이곳엔 나 같은 사람이 없으니 초심자의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건 그렇고 도서관 운영은 어떻게 하는 걸까? 하고 싶은 일은 혼자 후다닥 해치워 버리는 게 편한 나는 직원들을 이끄는 역할이 낯설기만 하다.
방법이 없다. 같이 배우자! 행정직원, 선임 사서, 병아리 사서, 임기제 직원, 청원경찰 그리고 나를 위해 배우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누구보다 좋은 관장이 되고 싶었고, 나를 첫 사수로 만난 병아리 사서의 맑은 눈망울에도 화답해 주고 싶었다. 알라딘 램프를 문지르듯 핸드폰의 전화번호를 밀어 옆 동네 사는 사서들, 독서운동가, 도서관 활동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세 사람에게는 친분을 빙자하여 밥을 사는 것으로 강사료를 퉁 쳤다. 한 사람에게는 내 통장을 열기로 마음먹고 네 번의 워크숍을 기획했다. 일명, 뭐부터 할지 몰라 시작한 워크숍.
칼바람이 부는 휴관일에 우리만을 위한 워크숍을 진행했다. 다른 동네에서 일하는 30년 차 사서 가 첫 시간을 열어주었다. 몇 년 전 그가 사서로 살아온 인생과 도서관에 관한 철학을 듣는 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업계의 사수를 드디어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옆에 있던 사람이 “아예 눈 속으로 들어가라, 들어가!”라고 할 정도로 그에게 빠져버렸다. 그때 느꼈던 감동을 직원들도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우리는 옹기종기 둘러앉아 대선배님께 동네에서 공공도서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해 조언을 들었다.
두 번째 시간에 만난 사람은 도서관계의 김미경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독서운동을 펼치는 그는 목소리가 크고 씩씩하고 자신감 넘치며 유머러스하다. 몇 해 전 함께 사업을 진행하면서 만난 그는 결과를 빨리 내고 싶어 하는 나에게 “회의만 1년 해도 돼요! 서두르지 마세요! 함께 만들어가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해주곤 했다.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주시는 그분께 독서동아리를 꾸리는 방법에 관한 노하우를 들었다.
재미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싶어서 옆 동네 사서도 초대했다. 옆 동네 도서관은 나도 꼭 한 번 일해보고 싶을 만큼 좋은 기획들을 많이 했다. 동네 출판사와 서점과도 자주 만나고, 동네 사람들과 잡지도 만들면서 도서관이 동네의 지식 커뮤니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러울 만큼 기획 잘하는 사서에게 한 수 두 수 세 수를 배우고 싶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아직은 낯선 옆 동네 도서관 프로그램에 직원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마지막으로 만난 분은 우리 동네에 사는 팔방미인 도서관 활동가이다. 이분께는 뭘 배워볼까? 섭외부터 하고 고민하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직원들하고 도서관 운영 계획을 만들어 봐요. 도와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코, 어려워요. 저도 초보 관장인 데다 저희 끼리 운영 계획을 세우는 건 무리예요.” 직원들과 함께 성장하자고 마음먹었지만 실은 우리의 역량에 믿음이 약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될 걸요? 나 믿고 한 번 해봐요!” 억지 믿음 덕분일까? 일 벌이는 거 싫어할 줄 알았는데 하고 싶은 게 넘치게 많은 직원들이었다. 한 달 동안 나는 뭘 본 걸까?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고 우리는 올해 해야 할 일 위에 우리가 하고 싶은 일 한 가지를 얹었다. 도서관 뜰의 머루가 보라색으로 익어가는 가을에 보라 축제를 열고 책 덕후들을 위한 코스프레 경연대회를 열기로 했다.
뭐부터 할지 몰라 시작한 워크숍 덕분에 직원들과 나는 To do list와 To be list를 갖게 되었다. 함께하는 동안 서로에게 든든하고 단단한 존재가 되어 보자고도 했다. 같이 배우자고 하길, 도와달라고 하길 정말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