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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 도서관장 Oct 30. 2022

언박싱의 기쁨과 슬픔

낭패다, 승진을 해버렸다. 덜컥 도서관장이 되어버렸다. 올해부터는 4시까지만 일하고 일찍 퇴근하는 엄마가 되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어떡하나. 단축근무제를 신청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 우는 딸들을 안고 달래다가 덩달아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언제 도서관 그만둘 거냐고 수년째 외치는 아이들의 말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머리가 핑 돌고 손도 저려왔다. 며칠 전에는 야간 행사 준비하러 내려간 빈 강의실에서 의자를 집어던졌다.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내친김에 하나를 더 내동댕이쳤다. 일의 늪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나에게 화가 났다. 오늘의 일, 내일의 일, 밤의 일, 주말의 일들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날들을 그만 끝내고 싶었다.      


십 수년째 겪고 있는 궁색하기 그지없는 인력과 예산으로 뭘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동안 ‘어떻게 저런 관장이 있을 수 있어?’ 하는 불만이 가득했지, ‘나는 이런 관장이 되겠어!’ 같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저런 관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졌다. 고심 끝에 결정한 최선이자 최상의 선택 카드가 날아가 버렸다. 정말이지 어떡하나. 한 번 터진 눈물보가 멈춰지지 않았다. 혹을 떼려다 붙인 격이다.      


옮기는 도서관에는 분명 어둠의 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습관이 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곱 박스나 되는 짐을 욱여넣고 무거운 마음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신호 대기 중 카톡이 울렸다. 슬픈 소식을 제일 먼저 전했던 동네 작가님이다. “관장 취임 축하 선물! 동네 작가들이 강연 선물을 준비했소.” 톡에는 동네 작가 네 명의 이름과 강의 주제, 날짜와 시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맙소사! 가득 차올랐던 슬픔을 감사의 눈물로 꾹꾹 삼켰다.       


출근 첫날, 어둠의 선물이 개봉되었다. 지하주차장에서 물 폭탄이 떨어졌다. 알고 보니 비만 오면 눈물을 흘리는 누수 전문 도서관이었다. 설계하고 시공하고 발주한 곳이 장기간 하자를 다투고 있었다. 눈물이 쏙 들어갔다. 초보 관장 1일 차인 나와 왕초보 신입 1일 차인 시설 담당 사서는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멋지고 아름다운 용도로의 공간이 아니라 안전하고 튼튼한 기본기로의 시설이 먼저라는 것을, 초보 관장이 되고 나서야 깨우쳤다. 몇 년 치 하자 관련 기록을 탐독했다. 틈 날 때마다 도면을 익히고 도서관 구석구석에 있는 설비를 외우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무너지진 않겠구나!      


일주일이 쏜살같이 흘렀다. 동네 작가들이 준 선물로 파티를 열어볼까? 나의 즐거운 상상에 먼저 있던 직원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여기는 어떤 강연을 해도 안돼요!” “다섯 명쯤 오는데요. 그중에 한 명은 꼭 딴죽 걸어요!” 그러고 보니 방문객 수도 꼴찌다. 선물을 물릴 수는 없다. 어떡하지? 할 수 없다. 도서관을 새로 여는 셈 치자고 마음먹었다. 대청소를 시작했다. 걷어내고 긁어낸 ‘하지 말라!’ 안내문이 탑처럼 쌓였다. 자료실도 발칵 뒤집었다. 사람들이 찾기 좋고 보기 좋게 책장을 옮기고 책을 배열했다. 휴! 이 정도면 동네 사람들도 도서관이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겠지?      


후배님들께 동네 조사를 숙제로 내주었다. 인구가 몇 명인지, 세대별 분포는 어떤지, 교육시설과 문화시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핫 플레이스는 어딘지,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의 패턴은 어떤지. 작은 것부터 큰 정보까지 가능한 많이 모아보자고 했다. 나는 동네를 잘 아는 직원과 발품을 팔기로 했다. 강의 포스터를 출력했다. 도서관 건너편 카페에서 커피를 사고 홍보를 부탁하니 자리를 내주었다. 야호! 동네 맛 집을 찾아가서 맛있게 밥을 먹은 다음 인사를 건네고 포스터를 드리니 그 자리에서 출입문 앞뒤로 붙여주었다. 이야호! 포스터를 더 많이 출력했다. 도서관 시야에 들어오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찾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반겨주니 낯선 동네에 금방 정이 들어버렸다.        


초보 도서관장 한 달째,  드디어 강연 선물을 펼치는 날이다. 다섯 명은 넘어야 할 텐데. 작아진 마음이 목표를 턱없이 낮추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았다. 다섯 명이 열 명이 되더니 스물다섯 명이 되었다. 슬금슬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동네 사람들이 도서관을 싫어하는 건 아닌지, 동네 작가들이 기쁘게 준비한 선물인데 받을 사람이 없어 무안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던 마음이 사르륵 녹았다. 행사의 달인이라는 나의 별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강연 파티로 동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선물을 준 작가들과 포스터를 한달음에 붙여준 동네 맛집에서 맛있는 회포를 풀었다.     


관장 축하 선물은 명품이었다. 어둠의 선물은 반품 불가였지만 고쳐쓸 만했다. 만난 지 며칠 만에 함께 움직인 직원들은 놀라울 정도로 손발이 잘 맞았다. 일 벌이기 좋아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직진해버리는 나는 자주 혼자인 적이 많았다. 협업을 못하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나에게 직원들이 곁을 내주었다. 눈물은 이럴 때 흘리라고 있는 거겠지. “어딘가 한구석이 모자란 사수는 많지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이상적인 사수는 없다.” 『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에서 위로받은 문장을 수첩에 적어 넣었다. 다짐도 함께 썼다. ‘그래, 이곳에서는 같이 성장하자. 그리고 같이 행복하자!’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완벽한 사수를 찾아 헤매다가 어느덧 나이 많고 실력 없는 사수가 되어버린 자괴감을 유예시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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