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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헤어질 수 있는 남자

by 김준정


<딸에게 주는 레시피>에서 공지영 작가는 딸에게 "잘 헤어질 수 있는 남자"와 사귀라고 했다. 헤어지는 순간에도 좋은 사람이라면 꽤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딱 한 번 연하의 남자 친구를 사귄 적이 있다. 그 애는 헤어지자는 나에게 줄기차게 전화를 해서 헤어지는 이유와 어제 어디 있었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나도 미안해서 대꾸를 하고 그가 하는 원망도 들었지만 이 일이 거듭될수록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이런 죄인 취급을 받아야 되나 싶었다.

"애초에 연인관계란 애정을 바탕으로 하는 건데 한쪽에서 애정이 없어졌다면 지속될 수 없는 거 아니야?"


참지 못한 내가 이렇게 말했고 이 말을 그 애는 우리 집으로 오라는 소리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애가 갑자기 나타나서 엘리베이터 밖에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게 아닌가? 시뻘건 핏줄이 선 그의 눈이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마침 아파트 정문에서 엄마를 만나 들어오는 길이라 내 옆에는 엄마가 있었다.


"아이고, 미친놈들 많다. 자 몇 층 사는 놈이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눈치 없는) 엄마가 말했다.


다음 날 집을 나서는데 (밤을 새운 건지) 그가 다시 나타났다. 또 헤어지는 이유와 어제 어디 있었는지 물었다. 나는 그만 모든 게 지긋지긋해져 버렸고 그나마 있던 정도 몽땅 사라졌다. 마음이 떠난 연인에게 매달리는 건 미련, 아쉬움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일이었다.

"도대체 하산은 언제 하는 거예요? “


정상 용화봉(654m)을 지나고도 이건 뭐 끝도 없이 올라갔다. 급경사와 로프 구간이 이어져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정상에서 점심을 먹었고 이제는 내리막길만 남았겠거니 했더니 웬걸, 잘못 헛디디면 아득한 골짜기로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길이 계속 나왔다.


청운봉, 등선봉까지 꾸역꾸역 오르고 나니 이제는 급경사의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흙과 낙엽, 돌들이 끝까지 질척거렸다. 마지막은 그냥 편하게 보내주면 안 되냐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생각해보면 그 애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 애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는데 평소 대학생 친구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내가 다니던 대학 근처에서 주로 만났고 내 친구들과도 자주 어울렸다. 그래서 헤어질 때 상실감을 크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의 결핍을 누군가를 통해 채우려고 하면 나중에 더 깊은 공허함에 시달리게 된다. 물론 그때는 나도 몰랐다. 20대의 나는 애정과 애정을 가장한 결핍을 구분하지 못했다. 남자가 매달리면 우쭐해지기도 했고 내가 이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올해 8월에 집중호우로 의왕댐 사고가 있었다. 인공수초섬을 고정하는 작업 중 5명이 숨지고 1명이 실종되었다. 삼악산은 의왕댐을 품고 있는 산이다. 3개월 전에 그만큼 비가 많이 온 탓에 흙이 쓸려 내려가서 길이 더 험했던 거였다. 사람 마음이나 등산로나 평소에 정비를 잘해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갖다 붙이다니요)


하지만 직접 올라가 보지 않고는 길의 상태를 알 수 없고 헤어져보지 않고는 그 사람이 헤어질 때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는 것 아닌가? 몇 번을 넘어지고 구르면서 이 길은 안 좋구나, 하는 거고 같은 질문을 수 십 번 받고 나서야(왜 헤어지는지 어제 어디 있었는지) 그제야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좋지 않은 이별에서도 배우는 게 있다. 공지영 작가가 딸에게 조언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본인의 경험 덕분이었다. (자격은 충분하다) 어쩌면 그런 경험 자체가 소중한지도 모른다. 끝이 두려워 시작하기를 주저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 길이 험할 것이 두려워 가지 않으면 더없이 고운 단풍과 높은 하늘도 보지 못하고 비록 처참하게 깎인 길도 오르고 보면 뜻밖의 아름다운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사람이든 산이든 다시 오르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할 이유다.


삼악 산장-깔딱 고개-동봉-용화봉(654m)-청운봉-등선봉-강촌교 코스였는데 다 내려와서도 출구를 찾지 못했다. 길이 아닌 곳으로 어떻게 가다 보니 뜻밖에 인도로 이어지는 출구가 있었다. 탈출. 뭐든 끝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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