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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Feb 20. 2021

초등학교 동창을 다시 만날 때

밤 12시 2분,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지금 누구하고 있는지 알면 깜짝 놀랄걸?”

대뜸 이렇게 시작하는 놈은 형진이다. 정확히는 술 취한 형진.

“이미 놀랐어. 그리고 안 궁금하면 전화 끊어도 되지?”

“끊지 마. 내가 오늘 방금 이 술집 문을 열었는데, 누가 있었는지 아냐? 바로 ‘박진욱’과 ‘채동호’. 심지어 여기는 너희 집 근처라고. 듣고 있어? 박진욱이 내 눈 앞에 있다고.”

“……박진욱? 그게 누군데? 난 잘 모르겠는데?”

“하하하. 왜 그래. 속 좁게스리.”


***


동성이었다면 틀림없이 죽이 척척 맞는 친구가 됐을 거다. 그렇지 못한 우리는 초등학교 내내 남자와 여자로 패를 나누어 줄곧 싸움만 했다. 도전장을 보내고, 누군가의 집으로 쳐들어 가고, 대문을 사이에 두고 대척을 했다. 다음날은 전 날 있었던 일로 서로 으르렁거리는. 끝이 없는 핑퐁게임 같았다. 그 중심에 형진과 내가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형진을 다시 만났다. 이제 싸울 수가 없는 우리는 한동안 어정쩡한 관계로 지냈다. 성인 남자와 여자가 돼버린 어색함과 친숙함이 공존하는 묘한 느낌이었다. 막 대하는 것 같아도 남녀 사이에 있을 법한 긴장감은 가지고 있는. 어느 날 나는 어떤 결심을 하고 형진에게 만나자고 했다.


“나, 할 말 있어.”

형진의 얼굴은 일순간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고백할 게 있어. 이건 오래된 감정이야.”

“말해봐.”

“진욱이 만나게 해 줄 수 있어?”

“박진욱?”

“그래, 박진욱.”

“할 말이 그거였냐?”

“기억나지? 진욱이 좋아한다고 내가 소문내고 다녔던 거.”

“애들이 진욱이 좋아한다고 놀리면 네가 좋아했던 거 기억난다, 진짜, 극성스럽기는. 무슨 여자애가 수줍음이라고는 없는 건지. 여자애들이 너 무서워서 진욱이 근처에도 못 갔잖아.”

“네 의견은 필요 없고, 내가 메일 보냈는데, 군대 갔는지 답장이 없더라고. 네가 좀 나서 줘야겠다.”


얼마 후 형진이에게 전화가 왔다.

“나 어제 진욱이 만났다.”

“어제?”

“그럼 이 전화는 어제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설마 잊어버린 거냐?”

“하려고 했어.”

“그런데?”

“내 말 잘 들어.”

“듣고 있어. 빨리 말해.”

“진욱이가…… 진욱이가 말이야……너를……”

“안 좋아한다고?”

“아니.”

“여자 친구 있데?”

“아니 없데.”

“그럼 뭔데!!!”

“네가 기억이 안 난데.”

“…”


****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다. 세 번이나 같은 반이 된 나를 기억을 못 하다니. 진욱이 하면 바로 내가 연상이 되어야 했다. 물론 내가 좋아한 걸로 소문이 나긴 했지만(이런건 왜이리 쓸데없이 정확한건지), 그런 나를 기억 못 한다고?


“변명을 하자면, 그러니까 내가 변명할 필요도 없지만. 진욱이에 대해서 생각해봐. 그때 좀 이상하지 않았냐? 어른스럽고, 말수가 적고 애들이랑 놀지도 않았잖아. 너 말고도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아무도 기억 못 하더라고. 나는 같은 동네에다 같은 중학교 다녔으니까 아는 거고. 담임이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도 모르더라니까.”


형진은 날 위로해주려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를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아……쪽 팔려. 진욱이 얘기 다시는 꺼내지 마.”


***


다시 현재, 술 취한 형진이다.

“내가 30분 동안 너에 대해서 설명했다는 것 아니냐. 그 뭐냐, 까맣고 키 크고 비쩍 마르고, 아, 그 육상 했다고 하니까 기억하더라고.”

“나 육상 안 했다고 몇 번 말해! 그냥 반대표로 계주 나간 거라고 했잖아.”

“사실이 뭐가 중요해? 어쨌거나 그걸로 진욱이가 널 기억했으니까 됐잖아?”

“정말 됐으니까 전화 끊을게.”

“우리 친구 지금 무슨 일 하는지 아냐? 검사다, 검사, 대한민국 국정원 검사. 대단하지 않냐?”


술을 얼마나 마신 건지 시큰둥한 내 반응에 아랑곳없는 녀석이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됐냐?”

“진욱이가 유부녀한테 늦은 시간에 전화하면 안 된다고 하길래 내가 그랬어. 얘는 유부녀가 아니고 ‘내 부랄 친구’라고. 어때? 잘했지?”

“아주 잘했다. 부랄 친구 이제 잔다.”


***


“언제 한번 보고 싶데. 진욱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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