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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y 28. 2021

뮤즈

'뮤즈'라는 간판의 호프집을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언제나처럼 주와 영, 썬과 함께였고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는 곳이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주문을 하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내 눈을 의심하는 일이 벌어졌다. 훌륭한 외모의 한 남자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배경이 흐려지고 오직 그 남자만 클로즈업된 장면에 나는 한동안 넋이 빠져있었고 그가 내려놓은 메뉴판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사장인지 직원인지 모를 그 사람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남자 속옷 광고에 나오는 모델 같기도 했고, 아니 더 비슷한 사람이 있는데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미인>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이름이 뭐더라, 그래, 오지호, 그는 배우 오지호와 쌍둥이처럼 닮은 얼굴이었다.     

팬티곽에 있는 사진, 영화 둘 중 뭘 상상해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나는 간신히 주문을 마쳤고 마른침을 삼켰다. 친구들 사이에도 어쩐지 평소와 다른 정적이 흘렀고 술이 오자 모두들 타들어가는 목부터 추겼다.      

"괜찮네."

앞뒤 맥락 없이 내가 던진 말을 주가 받았다.

"사장인가? 젊어 보이는데?"

“여자 친구 있나? 저렇게 생긴 남자가 애인이면 엄청 부담스럽겠다.”

영은 오늘 처음 본 남자의 여자 친구 걱정까지 했다.     


우리는 단골손님으로서의 존재감이라도 가지고 싶었는지 부지런히 뮤즈를 찾아갔다. 세 번째로 갔을 때 드디어(!) 그가 말을 걸어왔고 뻔한 고객 관리인 줄 알면서도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몇 살이에요?”

“26살이요.”

“나랑 같네요.”

놀랍게도 그는 우리와 동갑이었다. 약간 노안이다 싶었지만 괜찮았다.     

"내일 얘 생일이에요"

말이 끊길세라 내가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럼 내일 오세요. 케이크 사놓을게요."

주가 나를 재물로 삼으려는 거냐는 표정으로 노려봤지만 나는 절묘한 타이밍에 생일인 친구가 그저 사랑스러웠다.

     

다음날 영과 썬은 요즘 왜 거기만 가냐고 다른 데 가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하고 뮤즈로 향했다. 오지호는 준비성도 좋게 케이크뿐 아니라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친구들과 함께였다.     

“마침 친구들이 놀러 왔는데 괜찮으면 합석할래요?”

내숭, 수줍음, 부끄러움 따위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우리는 의논할 것도 없이 만장일치, 일사천리로 찬성했다.       


분위기는 안 좋으래야 안 좋을 수가 없었고, 나는 친구의 생일을 그렇게 진심으로 축하해보기는 처음이었다. 2차를 가기 위해 일어섰을 때 오지호가 따라 나왔다. 그의 친구들이 “가게 문 안 닫고 노는 건 처음인데 왜 그러냐?”라고 했고, 나는 어디서 근거도 없이 그게 꼭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날 오지호는 나에게 “너는 너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아”라는 칭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말을 해줬는데, 나는 그 말을 일종의 통행권이라고 생각하고, 사랑의 고속도로를 달리기로 결심했다.   

  

그는 매너 있고 어른스러웠다. 날라리라도 좋아했을 텐데 인성까지 갖추다니. 그 뒤로 몇 번을 손님으로 가게로 찾아갔고 그는 근무 중이었지만 나를 택시로 집까지 바래다줬다. 뭔가 시작될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초여름답지 않은 더위가 시작된 날, 등이 파인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를 주는 전혀 참하지 않아서 남자들이 좋아할 스타일인데, 나한테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나는 얌전하지 않은 그 옷을 입고 배고프다는 주에게 돈가스를 시켜주겠다고 하며 오지호를 보러 갔다.      


잔뜩 기대에 차서 가게 문을 열자 그가 어떤 여자와 마주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당황하는 걸 보고 나는 알아버렸다. 그가 함께 있는 여자가 여자 친구라는 걸. 다시 나가는 것도 이상해서 구석 자리에 가서 앉았다.     



사실 주의 생일날, 오지호는 전화번호를 물어보고는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나 여자 친구 있어”

그래서 나는 연락을 하지 않고 줄곧 가게만 갔던 거였다. 그게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로서는 그것밖에는 할 게 없었다.     


그가 나한테 전화를 하지 않아서 더 좋아져 버렸다. 불쑥 가게에 들어선 나를 볼 때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고 나를 기다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나한테 전화를 했다면 뻔뻔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뭐, 그래도 좋아했을 거다. 내가 무슨 도덕적인 인간도 아닌 데다가 그때는 이성이 사라진 땅에 있었으니까.     


주문을 했고 나는 쓴 맛이 나는 술을 마셨다. 주는 짭짭거리며 돈가스를 먹으면서 나를 보고는 쯧쯧 혀를 찼고, 이제 보니 그 블라우스 청승맞아 보인다고 말했다. 나는 비참한 기분에 얼마 있지 못하고 일어나버렸고, 그날 오지호는 당연하게 따라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한 게 없어서인지 나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동성로는 갔지만 뮤즈는 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왜 이제 뮤즈는 안 가냐며 놀렸지만 나는 그 말만큼은 대꾸하지 못했다. 짝사랑은 한 번도 해본 적 없고 상대보다 내가 더 좋아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사랑을 한다는 게 뭔지 몰랐던 나는 애완견을 쓰다듬듯 귀여움을 받는 게 연애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기에서 지금은 얼마나 진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관계는 끝난 뒤에도 아무것도 남기는 게 없다는 건 알게 되었다.    

 

그날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어쩌다 뮤즈를 지나게 되었다. 뮤즈 간판을 보며 친구들의 놀림이 시작될 때 나는 불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게 앞이라는 내 말에 2층에서 계단을 후다닥 내려오는 그가 보였고 5초 만에 내 앞에 나타났다. 한 달만 이었다.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 너무 빠른 그의 등장에 놀랐지만 나는 그냥 취한 척 웃어 보였다.      


"내일 영화 보러 가자"

앞뒤 인사도 없이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 한 마디는 죽어가는 나를 살리기에 충분했고, 생명의 온기를 전해 받은 나는 다음날 오후 3시에 만날 약속을 했다. 그의 속마음이 뭘까, 기대하는 마음과 다시 실망하고 싶지 않다는 두 개의 마음이 팽팽히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와 헤어져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데 문자가 왔다.     


"내일 약속 6시로 미루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여자 친구라도 만난 뒤에 날 만나려는 거야? 약속은 네가 먼저 한 거잖아!"

"뭐? 가게에 유리창 닦는 분이 오는 걸 깜빡해서 시간 바꾼 거야. 그리고 너 이상하다?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도 없고 우리 친구사이 아니야?"     


친구, 그래 우리는 친구사이였나 보다. 나도 모르는 새 우리는 친구가 되어있었지만 나는 그 친구라는 말에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눈물이 솟구쳤고 우는 걸 들키면 진짜 끝장이라는 생각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번에는 다시는 전화를 걸지 않기 위해 아예 전화번호까지 삭제해버렸다.


내가 정말 지질했던 건 애인이 있는 남자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좋아한다고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이야말로 못난 모습이었다. 먼저 좋아하고, 더 많이 좋아하는 게 뭐가 그리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당장 사귀고 싶다는 마음만 버렸다면 서로를 좀 더 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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