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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l 13. 2021

이십만 원짜리 펌을 하겠다는 딸

32년 전 어떤 하루가 생각났다

“나 파마하면 안 돼? 선생님이 끝에 살짝 하는 건 괜찮대.”

“내가 안 괜찮은데? 머리 감고 땋고 자면 파마한 것처럼 되는데 해줄까?”

“아, 싫어.”


나도 싫다고, 파마할 돈은 없다고 했다. 마침 엄마한테 전화가 와서 초밥이와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전화를 끊고 잠시 후 엄마가 다시 전화를 해왔다.     


“이십만 원 부쳤으니까 아 파마해줘라.”    

 

문득 32년 전 어떤 하루가 생각났다.      

“엄마, <영 미용실> 아줌마한테 돈 줘래이.”     

<영 미용실>은 엄마 친구가 하는 미용실인데,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혼자 파마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던지듯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보고 엄마는 컬이 참 잘 나와서 잘 어울린다는 말 대신 욕 한 바가지를 안겨줬다.


“가시나 뭐 저런 기 다 있노, 엄마는 뼈 빠지게 일하는 것도 모리고 누고 닮아가 야시질이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생생한 음성지원이 되는 이 느낌 뭐지) 엄마의 이런 격한 반응을 미리 예상한 나는 별 타격이 없이 거울을 들여다봤던 그날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어머니 많이 변하셨습니다.”

“니 파마하고 왔을 때 나는 쳐다도 안 봤더만 사진관 아저씨가 그래 이쁘다 카대.”      

 

그즈음 나는 컴퓨터 자격증 시험 원서에 들어갈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엄마와 사진관을 갔다. 사장님이 내 사진을 따로 찍더니 액자에 넣어서 사진관 유리창에 진열하고 우리한테도 같은 걸 준 일이 있었다. 그 사진관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어서 어떤 아이는 나한테 “대륙 사진관 딸이냐?”라고 물은 적도 있었다.    

 

갑자기 태도는 바꾼 엄마 때문에 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일관성 있게 멋 부리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해야 되는데 엄마는 그때 일로 나한테 미안해하기라도 하는 건가.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가. 나는 다 잊어버렸는데 엄마는 왜 잊어버리지도 않는 건지.    


나의 복잡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초밥이는 발걸음도 가볍게 펌을 하러 갔다. 전에 커트를 했던 미용실 디자이너 언니가 머리도 잘하고 친절하다며 그곳을 가겠다고 했다. 학교가 일찍 끝나는 수요일을 디데이로 잡았고 초밥이가 나간 지 30분쯤 지나서 나는 문자를 보냈다.     


“얼마래?”

“20만 원.”

“뭐?”


20만 원이라는 소리에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펌을 시작했냐고 하니까 샴푸만 했다고 해서 샴푸 한 비용만 계산하고 오라고 했다. 나도 20만 원짜리 펌은 한 적이 없는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20만 원이라고 하면 엄마한테 물어보고 해야지. 그냥 하려고 한 거야?”

초밥이는 할머니가 20만 원을 주기도 했고 그냥 빨리 하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누구는 돈 버느라 허리가 휘어지는데 녀석은 돈 무서운 줄 모른다 싶었다. 어? 이 익숙한 대사와 상황은 뭐지? 정확하게 32년 전 딸 역할을 했던 내가 엄마로 바뀌어서 엄마가 했던 대사를 하고 있었다. 신이 메가폰을 잡은 인생이라는 영화, 주제는 역지사지.     


나는 염색할 때가 한참이 지나도록 미용실에 안 가고 버티고 있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때 엄마 마음이 바로 이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그러면서 한편에서 미안함이 밀려왔다. 파마를 하러 가서 그냥 돌아온 초밥이가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싶었고, 어떻게 설명해야 초밥이가 수긍을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 그냥 엄마나 딸 역할 중 한 가지만 하고 싶었다.      




돌아오는 주말, 초밥이는 이전에 갔던 미용실에서 펌을 했다. 비용이 비싼 이유는 초밥이 머리카락은 탈색모에 검은색 염색을 한 머리라 펌을 하려면 열펌에 영양제를 넣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고, 내가 가는 미용실에 상담을 했더니 직접 봐야겠지만 대체로 그런 경우는 펌을 해주지 않는다고 했다.    

  

나의 단골 미용실에 며칠을 기다려 예약을 하고도 결국 펌을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중간과정을 생략하고 전개에 속도를 올리자 싶었다.

      

펌을 하고 난 다음 날 아침, 초밥이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어제는 동글동글 말려있던 머리카락이 자고 일어났더니 어찌 된 일인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탱탱하게 말려 올라가서 S자의 탄력 있는 웨이브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엿가락처럼 축축 늘어져서 장마철에 호숫가에 서있는 것 같은 부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친구들한테 파마를 한다고 실컷 자랑을 한 초밥이가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당분간 돈 아까운 일의 좋은 예는 이번 파마가 되겠다. 그지?"

"..."

그만하는 게 좋겠다는 신호를 감지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가는 미용실은 이렇게 될 줄 알고 펌을 안 해줬을 거야. 하지만 너는 계속 미련이 남았을 거고, 결국 그 미용실에 갔을 걸?”     


자기 몫의 경험을 하고서야 알게 되는 게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머리는 실패지만 책임감이 있는 미용실과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오히려 소득이라고 초밥이한테 말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녀석에게 어떤 순간에 이 일이 떠오를까 하고.          

파마한 날 우리는 기분좋게 짜장면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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