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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Jul 29. 2021

4등급이면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요

한 학생이 부모님과 과외 상담을 왔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성적이 떨어졌다며 큰일이 난 것처럼 말하는 부모님 사이에서 아이는 죄라도 진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성적이 떨어진 일이 부모한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성적이 떨어지면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속상하지 않을까? 학생이 떨어졌다고 하는 성적은 4등급. 4등급이면 상위 40퍼센트로 중간보다 높은 성적이다. 나는 경쟁이 공정하려면 평균이 평균으로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작가 채사장의 말이 생각났다(나는 과외선생님이면서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4등급이면 평균보다 높은 성적으로 칭찬을 받아야 할 성적이다. 평균 신장, 평균 몸무게, 평균 시력처럼 인정을 받아야 한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으면 평균 성적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볼 때 현실에서 평균으로 받아들여지는 건 상위 11퍼센트인 2등급인 것 같다. 학생이나 학부모나 2등급 안에는 들어가야 못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10명 중에 한 명을 뺀 나머지 9명은 열등감을 가진다는 결론.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이런 입시환경을 만든 것도 모자라 10중 한 명이 되지 못했다고 아이에게 다그친다는 게 말이 되는 걸까.     


우리도 이런 무한 경쟁 교육의 산물이다. 그 안에서 학습되는 건 오직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는 사고와 구조의 불합리함을 보지 못하게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학원 강사로 일을 할 때, 고등부 수업을 했던 나는 가끔 중등부 선생님의 수업을 대신 해준 적이 있었다. 고등부 수업은 늦은 시간에 있었고, 선생님들이 어떤 사정으로 결근을 하게 될 때 내게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처음 한 두 번은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었지만, 나는 한 명인데 여러 선생님들의 수업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억울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불만이 쌓여갈 때쯤 한 남자 선생님이 집에 제사가 있다며 수업을 부탁을 했고 나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해버렸다.


“내가 사정이 있을 때 내 수업을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당연히 그 남자 선생님은 무척 미안해했고, 나는 충분히 생색을 낸 뒤 수업을 해줬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날은 그 남자 선생님의 아버지 제사가 있는 날이었고 고향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한테 그가 가야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냥 기분 좋게 해 줄 걸....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학원에서 숙식을 하기도 했던 선생님이라 이후에 그를 볼 때마다 미안했다.


사실 이건 선생님이나 내가 미안할 문제가 아니었다. 강사가 사정이 있어 수업을 하지 못할 때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은 학원의 책임이었다. 강사에게 월차도 없이 무급 주말 보강만 강요한 원장에게 요구를 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스스로 문제의식을 가졌어야 했지만 20대의 나는 학원에 요구할 생각도,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브런치에서 읽은 살곰살곰 님의 글이 생각났다.   

  

“1등을 했다고 축하해주기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아도 응원해주고 도와주는 게 진짜 부모 역할이라고 생각해.”     


자녀가 1등 했다고 부모가 선물을 사주고 칭찬을 하면 아이는 1등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계속 1등 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가족만이라도 따듯한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누더기를 입고 떠돌이처럼 살아온 내가 내 자식에게 편안한 집과 같은 존재가 되어준다면 그것만큼 나한테 보상이 되는 일이 있을까.     


내 자식은 물론 다른 자식들까지 사지로 내모는 게 자식에게 1등 하라고 종용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가 1등 하기 위해서는 다른 아이들이 그 밑을 떠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이 각자 원하는 일에서 1등을 할 수 있도록 부모가 정서적 안전망이 되어주고,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귀한 인연으로 만난 우리끼리라도 서로 보듬어주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 냉정한 평가에 상처 받은 아이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너는 귀한 존재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마흔이 넘은 내게도 필요한 사람, 내가 내 딸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어야 한다. 내 딸도 언젠가 자기의 아이에게 집이 되어줄 수 있다면, 그때 한 번이라도 나를 떠올릴 수 있다면, 나는 내 딸에게 내 손자에게 영원히 살아있는 거니까.  

 


  

내가 경험한 바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성적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노무사가 되어서 노동자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포브스에 선정한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러려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보려고요.”      


이런 건 쫓기는 마음에서는 생길 수 없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눈앞에 보이는 점수에 전전긍긍하는 학생이 이런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나를 믿어주는 부모와 대화를 하다 보면 생각은 구체화되고 의욕은 점점 커지게 된다. 좋은 인재란 나의 재능을 나 혼자 잘 사는데 쓰는 게 아니라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데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가 미치도록 좋아서 만든 이론들을 이렇게 미치도록 싫은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있구나.     


교과서에 나오는 시, 소설, 역사, 경제, 윤리는 누군가가 자기 안에 있는 요구에 몰두한 결과다. 사교육을 하다 보면 나와 아이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인물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힘껏 달리고 있는 기분이 든다. 인간이 위대해지는 순간은 내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욕구에 최선을 다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때 잠재력이 발휘되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아 감동을 주게 되는 거라고 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게 아닌 강요된 것을 하다 보면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이건 내 삶을 주인으로서 살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닐까.

    

나는 수학 과외선생님인 주제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아무래도 제일 문제는 나인 것 같다.

상담을 온 그 학생은 수업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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