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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살고 있는 아이는 누구

by 김준정

“밤에 놀고 싶냐?

“어.”

“그렇게 해.”

“왜.... 그래....”

“어제는 '게이지 올라간다'문자 보내고, 그저께는 '기어들어와라'보내고, 이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야. 나는 자유를 원해."


초밥이가 주짓수 끝나고 몇 시에 들어오는지 시간 확인하고, 문자 할까? 조금만 이따 하자, 또 늦네? 보자 보자 하니까 엄마를 뭘로 보고, 가만히 있으니까 지금 나를 가마니로 보는 거지, 이런 심적 갈등에 더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나타난 녀석의 말간 얼굴을 보고 안도와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도 사양하고 싶었다. “늦어서 미안해”라고 말하지만 원뜻은 ‘엄마 때문에 더 못 놀았잖아’를 중얼거리고 제방으로 쑥 들어가는 녀석의 뒤통수도 보고 싶지 않았다. 기다린 동안에도 혼자였는데 초밥이가 온 뒤에도 덩그러니 혼자인 현실을 마주하고 보면 여태 나는 누구를 기다린건지 아연하기만 했다.

KakaoTalk_20211017_072649682.jpg 내가 기다리는 모습과 비슷하다


어제 초밥이 담임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녀석이 사고를 친 건 아니고 2학기 상담주간이었다. 30대 초반의 담임선생님은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쾌활한 분이었다.


“초밥이가 어머니한테 학교 얘기 많이 하나요?”

“하긴 하는데 편집을 심하게 하는 것 같더라고요. 오리지널 버전을 듣고 싶다고 하는데도 자꾸 편집을...”

“하하하. 실제로 초밥이가 학교 생활을 잘해요. 적극적으로 발표하고 학급 봉사를 하는 일에도 항상 먼저 나서고요. 초밥이 덕분에 반 분위기가 좋아요.”

“선생님 사실 제가 고민이 많아요. 그동안 잔소리를 안 해왔다고 자부해왔는데 요즘 초밥이가 화장, 옷, 휴대폰, 귀가시간 등 활동 무대를 넓히는 바람에 제가 흔들리고 있어요.”

“아, 말씀하시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어요. 화장은 비비크림까지만 허용되고 아이라인, 마스카라, 아이섀도 같은 눈 화장은 안되는데 한 번은 초밥이가 아이라인을 하고 와서 제가 지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아... 그 부분 편집되었네요.”

“후후, 그래도 그날 이후로는 눈 화장 한 적 없어요. 초밥이는 한번 얘기하면 그 일로 다시 지적받지 않도록 조심해요.”


초밥이가 “아이라인 살짝 하는 건 괜찮아”라며 아침마다 성실하게 라인을 잡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미 된 자로 차마 이르지는 못하고 아네,라고만 했다. 선생님은 초밥이가 내년에 있는 전교 부회장 선거에 출마를 원해서 담당 선생님과 상담을 마쳤고 뭐든 도전하는 모습이 예쁘다고 했다. 나도 초밥이가 담임선생님과 학교 선생님들이 좋아한다며 감사하다는 말로 훈훈하게 통화를 마쳤다.


아닌 게 아니라 교육방송의 한 장면 같지만, 욕을 찰지게 잘해서 웃긴 한문 선생님, 너무 잘 생겨서 결혼하고 싶은데 벌써 결혼해버려서 아쉽다는 사회 선생님, 옷을 간지 나게 입는다는 영어 선생님까지 초밥이 얘기를 듣다 보면 “어떻게 너희 학교에는 하나같이 좋은 선생님들밖에 없냐?”라고 묻게 된다. 그러면 초밥이는 “그러니까, 빨리 학교 가고 싶다니까”라고 한다.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는데 선생님 말로는 지금까지 꾸준히 책을 읽고 독서기록(생활기록부에 하는)을 하는 사람은 초밥이밖에 없다고 했다. 나는 초밥이가 독서기록을 하는 줄은 몰랐고 아빠와 2주에 한 권씩 책을 읽고 독후감을 메일을 보내기로 한 약속 때문에 마감일마다 간신히 책을 읽고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독후감을 쓰는 건 목격했다. 나한테 두껍지 않으면서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해서 <열네 살의 인턴쉽>, <리저드 베이커리>, <열일곱 살의 털>,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같은 걸 실컷 말해주면 다른 책을 읽고 있는 건 봤다.

내가 <데미안>의 주인공이 싱클레어라고 하니까 초밥이가 “싱글레귤러?”라고 하고, “두 가지 중에 엄마는 후자야"라고 했더니 ”후자가 누구야?"라고 한 일은 기억하고 있다. 많이도 안 바라고 그냥 대화할 수준으로만 책 좀 읽으면 안 되겠냐고 말해야 하는 현실을 살고 있는 내가 선생님한테 '책을 좋아하는 아이'의 얘기를 듣고보니 혼란스러웠다. 우리 집에 살고 있는 아이는 누구인가.


책을 어떻게 고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가증스럽게도 녀석은 “엄마가 책을 많이 읽어서 추천을 해준다”라고 했다지 않나. 내가 추천한 책은 읽지도 않았으면서 뻔뻔스럽기도 하지. 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입에 자크를 채운채 네네, 라고만 했다. 홍길동이 생각났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초밥이 뒤에 앉은 아이가 “과분산 걸렸나 봐요.”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과부하겠지요. 책 좀 읽으세요.”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초밥이는 내가 생각나서 혼자 빵 터졌다고. 그걸 나한테 얘기해주면서도 웃겨 죽을라고 했다.


아무튼 독서에 관해서는 이런 속사정이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독서가로 이미지 관리를 초밥이가 낯설었다. 우리 집에 살고 있는 아이는 누구인가라는 질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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