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민 동동맘이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수제 맥주 마시러 갈래?”
원래는 해망동 수산시장에 가서 주꾸미를 사서 샤브샤브를 할 계획이었지만 오랜만에 친구도 만났겠다 기분이 들떠서 밖에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우리의 우정은 술로 빚어진 게 아니었던가. 동동맘에게는 세 명의 오빠가 있는데 오빠들은 우리에게 ‘벌떼들’이라는 찰떡같은 이름을 붙여주고 요즘도 “벌떼들은 잘 있냐?”라고 물어본다고 했다. 이런 기억들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절도 되돌아간 듯 마구 대책 없어지고 싶어졌다.
우리는 <군산비어포트>의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동동맘이 주말에 창가 자리가 비어서 운이 좋다고 했고 나는 군산에서는 ‘언제든 가능한 일’이라고 알려줬다. 지난번에 안주가 아쉬웠는데 오늘 주문한 마르게리타 피자와 먹태는 맥주와 궁합이 딱이었다. 그래도 주인공은 수제 맥주. 매진으로 맛보지 못했던 스타우트와 쌉싸름한 페일 에일, 부드러우면서 기본에 충실한 라거까지 모두 신선하고 향이 좋아서 마실 때마다 감탄했다.
웃고 즐기는 사이 주위를 둘러보니 손님은 우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6시가 안 돼서 들어간 것 같았는데 시간은 벌써 10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항상 왜 이런 거냐?”
그 시절에도 술을 마셨다 하면 2배속으로 흐르는 시간 때문에 새벽에 헤어지며 우리는 “쓰레기차 조심해”라고 인사했다. 쓰레기인 줄 알고 실어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당부였다. 이제 한 가정을 책임지는 어엿한 어미가 된 벌 두 마리는 집에서 2차를 하기로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다음날 아침 7시, 수산시장에 가서 장을 보러 나가다가 혹시 같이 가고 싶냐고 동동맘에게 물어봤지만, 예상대로 거절해서 혼자 시장에서 생태와 굴을 사고 이성당으로 갔다. 개점 시간(8시)까지 이십 분이 남아서 기다렸다가 단팥빵과 야채빵을 10개씩 샀다.
집에 돌아와 간만에 술을 들이부어서 꿀꿀해진 속을 풀어줄 아침밥을 준비했다. 생태탕을 끓이는 동시에 미나리를 데치고 굴전을 부치는 나를 보고 동동맘은 가스레인지 세 구를 쓴다며 놀라워했지만 나는 사실 하나가 고장이 나서 세 개만 쓰는 거라고 말해줬다. 요리의 생명은 스피드이기 때문이다.
생태탕 국물이 시원하다며 한 그릇 비우고, 군산 여행의 증거 이성당 빵 봉투와 함께 동동맘은 평택으로 떠났다. 젊고 풋풋했던 시간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동동맘과 약속을 하고 기다리는 열흘 동안 친구만 오는 게 아니라 그 시절이 함께 오는 기분이었다.
동동맘이 오는 날, 새벽부터 청소와 몸단장에 분주했다. 2시간 후에 도착한다는 톡을 받고 나는 처음에 입었던 통바지와 검은색 티셔츠를 벗고 레깅스에 후드티로 갈아입으면서 뭐가 나이 들어 보이지 않을까 하고 거울을 이리저리 비춰봤다. 공들여 화장하고 머리를 말리는 꾸밈 노동도 참 오랜만이었다. 2년 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늙어 보이고 싶지 않아서 일주일 동안 팩과 마사지를 했는데(그런데도 그 모양이었네, 친구) 어쩐지 물살에 떠내려가는 슬리퍼를 주으려고 버둥거리는 기분이었다.
친구가 덮을 이불부터 식사, 산책코스를 부지런히 생각했다. 나만큼 걷는 걸 좋아하지 않는 동동맘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은 코스를 고르고, 음식이든 뭐든 많이 준비하면 미안(?)해할지 모르니까 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주중 내내 춥다 따뜻하다를 반복하는 날씨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일도,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하는 일도 무척이나 설레게 했고 이건 한동안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동동맘은 이제 아줌마 다됐다며 한숨을 쉬었지만 내 눈에는 여리여리했던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군인 남편을 따라 이년에 한 번씩 이사를 가면서 적응하기 위해 애쓰며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산책을 해도 어제와 다른 코스로 가는 나와 같은 길을 걸을 때 편안해하는 친구.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무턱대고 저지르고 보는 나에 반해 친구는 몇 번을 고심해서 안전한 길을 택한다. 그런 서로를 불안하게 혹은 답답하게 바라본 시간을 거쳐 여기까지 오고 보니 해야 될 이유를 찾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도 다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내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동동맘은 경기도에서 돌이 막 지난 아들을 데리고 왔다. 친구도 낯선 도시에서 아이 키우느라 힘들었을 때였는데 수유쿠션과 흔들침대를 가지고 와주었다. 아끼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해야 될 이유가 많아지는 사람이 동동맘이다. 받은 사람은 오랫동안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는 걸 알까(말해야 알지). 내 생각과 감정에 골몰하는 나 같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오래가는 무언가를 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때 아장아장 걷던 돌쟁이는 이제 중학교 3학년 오빠야가 되었고 앉지도 못했던 초밥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다. 간간히 만나서 놀았던 둘을 우리가 영상통화를 하게 했더니 서로 얼굴이 아닌 발을 비추며 “오빠 다음에 만나” “그래 다음에 만나자”같은 수줍기 짝이 없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수유쿠션을 나눠 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감개무량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웃음뿐 아니라 그냥 나이만 먹은 건 아니지, 라는 말도 주고받은 것 같았다.
“그냥 내 인생에 아무 생각 없이 놀아본 시간이었어.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좀 밋밋했을 것 같아."
"맥주가 없는 인생처럼?"
동동맘이 남기고 간 말에 뒤늦은 대답을 해본다.
다음에는 <코스모스>에 빠진 친구와 계산기와 친한 친구와 '벌떼들' 완전체로 모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