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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r 15. 2022

학생들 다시 가출 같은 거 하지 마세요

지리산 아빠의 코로나 확진으로 등산 계획이 무산된 주말이었다. 초밥이와 어디라도 갈까 싶어서 갈만한 곳을 찾다가 4년 전 이맘때, 초밥이와 하동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발견했다.     


“섬진강에서 찍은 사진이야. 기억나?”

“이때는 완전 순둥했네.”

사진 속 초밥이는 지금처럼 무섭지 않았다. 무엇이 이 아이를 변하게 했을꼬.

“우리 내일 놀러 갈래?”

초밥이가 고민하는 사이 내가 말을 이었다.

“가기 싫으면 그냥 말해. 우리 사이에 솔직한 거 빼면 뭐가 남냐?”

“가기 싫어.”

깔끔했다.     


가족끼리 한 번씩 여행도 가고 그러는 것 아닌가. 하기야 나도 어디를 가도 녀석의 눈치 보느라 얼마 걷지 못하느니 혼자 산에 가는 게 더 좋긴 했다. 이렇게 또 우리는 한마음이 되었지만, 지금밖에 만들 수 없는 추억을 놓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엄마 수업 몇 시에 끝나?”

이렇게 물을 때는 별로 반갑지 않은 요구를 할 때다.

“왜 그러는데.”

“지유랑 선유도 가려고 하는데 엄마가 데려다주라. 사진도 찍고 폭죽놀이도 하려고.”

이번에는 내가 고민하는 사이 초밥이가 당당하게 말했다.

“안되면 버스 타고 갈게.”

밤에 컴컴한데 버스를 어떻게 타고 오려고. 선유도는 우리 집에서 차로 40분 거리지만, 새만금 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배를 타고 가야 했던 섬이다.      


어제 허리를 삐끗한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아침부터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허리가 왜 이렇게 아프지?”

“날씨가 흐리니까 그렇겠지.”

허리가 아픈데 운전을 어떻게 하냐는 뜻이었는데 할머니 취급이다.     

“거기서 김밥이랑 라면 먹을까?”

“좋지.”

할머니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뜨거운 물이랑 김치를 주섬주섬 챙겨서 주차장으로 갔다. 지팡이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집 근처에 와있는 지유를 태우고 선유도로 향했다.

“되게 멀다, 나는 바빠서 갈 테니까 올 때는 저 버스 타라, 아니다, 저기 사람들 많네? 저 사람들한테 차 태워달라고 해라.”

선유도로 들어가는 99번 버스와 새만금 방조제에서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고 내가 말할 때마다 지유는 “네?”하며 놀랐고 초밥에는 “우리 엄마 장난치는 거야”라고 했다. 그리고는 뒤에서 자기들끼리만 조잘조잘 떠들었다. 초밥이가 나한테 다 했던 얘기를 하길래 내가 끼어들어서 결정적인 대사를 쳤고, 초밥이가 “스포하지마”라고 했다.   

  

지유는 조금 4차원 소녀 같은 이미지였는데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다.

“나 뉴욕에 살고 싶어.”

이번에도 내가 냉큼 대꾸했다.

“무녀도 가는 다리 위에서 뉴욕이란 단어를 들으니까 진짜 다른 세상 같다. 우리는 지금 전라북도 군산시 옥도면에 있거든.”     

후후후, 초밥이가 지유한테 “웃어주지 마”라고 했지만, 지유는 나의 자잘한 유머에 처음에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 30분 만에 적응한 것 같았다. 김밥 한 줄만 먹겠다는 지유한테 내가 넣어 둬 넣어 둬, 하면서 두 줄을 줬더니 금세 다 먹어서 초밥이가 “너 배고팠냐?”라고 했다.     


“뉴요커들은 꾸미지 않은 시크한 분위기가 멋있어, 그지? 전문직이 있을 것 같고 뭔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것 같고 말이야. 솰라솰라 영어 하는 것도 근사하고. 뉴욕에 살아서가 아니라 그런 걸 동경하는 것 아닐까?”     

그때 초밥이가 끼어들었다.

“엄마, 지유는 긴 설명을 듣는 면역이 없잖아.”

“알았어, 그만할게. 하지만 너도 내가 말이 길어진다 싶으면 스위치를 끄고 안 듣는 거지, 면역이 있어서 듣는 건 아니잖아.”

긍정의 침묵이 흘렀다. 

    

선유도에 도착하자 손님 둘은 순식간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해는 금세 저물고 사방이 뻥 뚫린, 눈 둘 데라고는 아득한 수평선밖에 없는 그곳에서 나는 여기서 뭘 하는가, 질문하며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허리라도 아프지 않으면 걷던가 자전거라도 탈 텐데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살살 걸어서 육개장 세 개를 사 온 뒤 손님들 추우면 입을 파카를 지키고 있는 것뿐이었다.      


노을이 바다에 물드는 모습을 아름다웠다. 오묘한 색으로 변하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다. 이 장면을 배경으로 얼굴만 보며 사진 찍느라 정신없을 초밥이를 생각하며 나는 이제야 내가 아닌 바다를 바라볼 때가 되었나 싶었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순간

해가 바닷물에 잠기자 초밥이한테 전화가 왔다. 나는 추위에 떨다 온 두 어린양에게 파카와 뜨거운 라면을 전달했다. 

“학생들 이거 먹고 집에 들어가서 다시 가출 같은 거 하지 마세요. 알았죠?”

초밥이가 “네”라고 했다.   

   

허겁지겁 컵라면을 먹는 초밥

폭죽까지 알차게 터뜨린 뒤 지유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지유가 내리자 초밥이가 말했다.

“엄마 오늘 고마웠어.”

그래, 같이 놀아야 맛이냐, 뒤에서라도 함께하면 되는 거지. 이것도 추억이 되겠지. 이제 너는 엄마라는 존재보다 엄마의 시간이나 돈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뒤돌아봐주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그저 '바라볼 때'니까 그렇게 하자.

물가에 내놓은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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