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은 학생일 때만 치는 게 아니던데 02
“시험 기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걸로 만들어줘.”
아침에 떡국을 얌전하게 끓여놨더니 생전 안 하던 반찬투정이다.
“그럼 뭐 해줄까?”
“돈가스.”
초밥이는 떡국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고, 텀블러도 식탁 위에 놓고 학교에 갔다.
수학 시험 본다면서 뭘 먹고 가야 문제를 풀지. 물도 안 마시고 어쩌려고. 그렇게 하루 종일 초밥이 걱정을 한건 아니다. 잠깐 생각하다가 글을 좀 쓰고 운동하고 장을 봐서 집에 돌아왔다. 십센치의 노래를 들으면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초밥이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 나 수학시험 봤는데...”
“울어?”
“나 진짜 100점 맞을 줄 알았는데 첫 장부터 바이트 문제(단위 바꾸는 문제) 나와서 망했다 싶었어. 제치고 푸는데 갑자기 십분 남았다고 해서 부랴부랴 서술형을 푸는데 답안지가 아니라 식을 시험지에 쓴 거야. 서술형 답지가 따로 있다는 거 알고 있었는데 긴장해가지고. 답안지에 식을 옮겨 쓰는데 오분밖에 안 남았다고 해서 정신없이 마킹하고 손 올리라고 해서 한 문제는 답도 못썼어. 얼른 찍을까 하다가 부정행위로 빵점 처리될까 봐 그냥 냈어.”
“오늘 애썼네. 치즈케이크 사놨어. 어서 와.”
시험 치는 게 무슨 벼슬이냐, 하면서도 나는 녀석의 기분을 달래줄 치즈케이크를 사 왔다. 집에 오자마자 초밥이는 케이크는 거들떠보지 않고 채점부터 하더니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가만히 초밥이를 안아줬다. 그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 녀석의 기분을 낫게 해주는 건 자기보다 점수가 낮은 친구들뿐.
“엄마 나한테 실망했지?”
“나보다 네가 속상한 거 아니야?”
진정이 되자 초밥이는 시험이 어려운 거 맞냐며 나한테 보여줬다. 까다로운 문제가 여러 개 있어서 당황스러울만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벗어나는 난이도는 아니었다.
“교과서 몇 번 풀었어?”
“한번.”
“다음에는 교과서 단원 문제 연습장에 옮겨적고 반복해서 풀어봐.”
“왜 나한테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어?”
“네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잖아. 너도 나름의 방법으로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강요한다고 생각했을걸?”
“그래도 알려주지.”
내가 몇 번이나 도와줄까, 모르는 거 물어봐,라고 했을 때, “콴다치면 다나와”라고 했던 그 쿨한 아이는 어디로 갔을꼬.
사교육에 종사해온 내가 처음으로 아이의 시험기간을 통과하는 걸 보는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점수 때문에 울다 웃는 아이를 보고 (무서우면서도) 이 펄펄 살아있는 감정에서 커나가는구나, 처음 겪는 좌절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아이가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했다. 이번 일로 실망해서 앞으로 있을 많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역시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반면 학생들도 내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이렇게 애끓는 심정이겠구나, 태연한 척한 것뿐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나, 참으로 상반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지난번 장난신고로 경찰서에 전화를 받고 난 후 나는 청소년상담센터에 상담 신청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기질검사를 하고 이번이 두 번째다. 초밥이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어 시험을 치면서 그 시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의욕을 잃어가는 걸 보았다. 시험 점수가 유일한 기준이 아니고,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시험이 전부인 분위기에서 승자는 없다. 공부 잘하는 아이마저 원하는 일보다는 높은 성적이 아깝지 않은 경쟁률이 높은 진로를 택하고 조바심에 시달린다.
나는 초밥이한테 친구들하고 놀 때 쓰라고 이만 원을 줬다. 앞으로 나는 초밥이가 시험을 망할 때마다 보상을 줄 생각이다. 나도 살아보니까 실패했을 때 막상 찾아갈 사람이 없더라. 너는 망했다는 생각이 들 때 나를 떠올렸으면 좋겠다.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는 궂은날 네가 찾아올 수 있는 집이 돼줄 거다. 오랫동안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만 했는데 내가 너한테 그런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니 보상을 받는 기분이다.
초밥: 시험 기간에 왜 비가 오는 거야.
나: 마음에 비가 오는 게 문제겠지.
초밥: 맞아, 시험지에 비가 오는 게 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