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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Apr 22. 2022

너도 15살은 처음이겠지만

한참 수업하고 있는데 초밥이가 나를 불렀다.    

  

“엄마 전화 좀 받아봐. 친구가 실수로 경찰서에 신고했는데 경찰관이 엄마 바꿔달래.”

초밥이에게 전화를 넘겨받았다.

“네. 제가 엄마예요. 무슨 일인가요?”

수화기 너머에서 한 남성이 00 지구대 00 경찰관이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말을 이었다.  

   

“김 00이라는 학생이 문자로 신고를 했어요. 어머님 자녀가 성희롱당했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들은 실수했다고 하지만 신고 접수가 된 이상 사실관계를 확인해서요. 만약 장난이라면 공무집행 방해한 점 아이들에게 엄격하게 주의를 주어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님께서 확인하시고 00 지구대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바쁘신데 정말 죄송합니다. 곧 전화드리겠습니다.”     


초밥이 진술에 의하면 친구가 수신번호를 112로 하고 신고하는 것처럼 문자를 써서 캡처만 하려는 게 잘못 전송 버튼을 눌렀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성희롱을 당했다는 장난이라니. 이건 나의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이런 자극적인 놀이를 할 정도로 내가 모르는 아이의 생활이 있었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일단 나는 수업을 해야 해서 초밥이한테 아빠한테 전화해서 경찰관에게 사과하도록 하라고 했고, 사유서를 써서 보여달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부모님 생각을 했다. 나는 ‘수건 사건’으로 아빠와 한 달째 연락을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너거 엄마 정리 못하는 걸 네가 닮았고, 초밥이가 수건 개는 거 보이 초밥이도 똑같더라.”     

어릴 때부터 아빠는 한 살 터울의 오빠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장차 엄마, 아내가 될 사람의 의무를 나에게 강요했지만 그때는 그랬다 치고,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빨래를 갠 초밥이까지 들먹이고 보니 신사임당도 화가 날 노릇이었다.      

“왜 여자는 수건도 잘 개야 하는데요?”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였지만 도발은 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아빠가 만사 짜증 나는 날이었지 불을 확 당겼다.     

“너 그렇게 혼자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단 말이다.”

“아빠, 다들 열심히 살아요. 비난하는 말 좀 안하면 안 돼요?”

(비난하는 하지 말라고 비난한 게 내가 생각해도 웃기지만)

“네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남들이 니를 안 좋게 본단 말이다.”

“남들이야 그렇게 보든 말든 아빠가 왜 그런 말을 하는데요.”     


아빠가 나를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한 이야기지만, 그날만큼은 그 마음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자기가 정한 틀에서 자식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지적하기를 오랫동안 해왔다. 남들한테 손가락질받기 전에 자기가 먼저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자식을 얼마나 숨 막히게 하는지, 세상에서 단 한 사람한테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나한테는 아빠인데 왜 그걸 모르냐고 말하고 싶었다.     

원망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는 대상에게 품는 이런 마음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제발 나는 이런 마음을 자식한테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살아간다는 건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는 거라고, 누구든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해줄 수 없었을까. 실패를 용납하지 않고 이상적인 것만 요구하는 아빠에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는가. 이제와 이런 못난 마음을 가지는 게 말도 안 되지만 지금까지도 같은 요구를 하는 아빠를 보면 나도 모르게 쌓아왔던 울분이 터져버린다.     


내가 원하는 길보다 정답 같은,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 같은 길을 택해왔다. 지금 나는 그 길을 되짚어가면서 원래 내가 가려고 하던 곳을 찾는 중이다. 가끔은 주저앉아 길을 잃게 만든 게 아빠였다고 원망하는 날도 있었다.     


안다는 게 뭘까. 그날 밤 나는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던, 선량하고 마음 여린 사람을 원망한 걸 후회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절망을 안겨준 내가 아빠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네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어떻게 이런 딸을 낳았나 싶었다.”

아빠가 언젠가 나한테 한 말이다.      


영화 <밤에 우리 영혼은>에 루이스는 젊은 시절 자기가 한 외도 때문에 딸이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걱정하는 아빠에게 딸은 이런 말을 한다.     


“아빠가 기차놀이를 사주시고 같이 만들자고 하셨죠. 완성하고 나면 그 기차가 우릴 멋진 곳으로 데려다줄 거라고요. 저는 지금 저만의 기차를 만들고 있는 거예요.”     


아픔조차 내 것이니 끌어안고 살아볼 테니 아빠는 죄책감을 내려놓고 그저 지켜봐 달라는 말이었다. 딸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루이스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드는 걸 보고 나도 눈물이 났다.  

    

언젠가부터 나는 자식보다 부모 입장에서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삶은 끊임없는 역할 바꾸기 같다. 그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떻게 하는 게 옳을지, 이 모든 일이 자기 때문이 아닌지 스스로를 단죄하고 후회했을 아빠의 수많은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둠에 갇혀 있다가 날이 새고 드러나듯 나는 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너도 15살은 처음이겠지만 엄마도 15살 딸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수건 사건'후 부모님께 차려드린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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