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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Oct 30. 2022

사주에 남자가 없단다

“니 사주에 남자가 없단다."  


엄마한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허 참, 나 이 거참,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비밀로 하다가 60살쯤 됐을 때 말해주지,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비워졌다.      


“남편 밥 안 해주고 조용하이 사는 기 안 좋나?”

엄마가 말한 밥때문은 아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인데 언젠가부터 엄마가 나를 향한 감정이 안쓰러움에서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너거 아빠 같은 사람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며 하소연을 하면 나는 한참을 들어주다가 그래도 살아야지 어떡하냐고 하다가, 이거 뭔가 바뀐 것 같은데,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아무튼 최근에는 응원하는 엄마 마음을 느꼈다.   


“야가 글을 쓰는데 잘 되겠나?”

사주를 봐준 (만권의 책을 읽었다는) 동창인 분에게 엄마가 물었다.

“암만 열심히 해도 사주에 관에 있어야 되는데 한 번 보자고.”     

그렇게 운을 뗀 동창은 내 사주에 관이 두 개가 있어서 출판사만 잘 만나면 성공하겠다, 53세부터 일이 술술 풀린다고 정확한 나이까지 콕 집어서 말했단다.      


타로 카드 운세를 두 번 본 것 말고 점을 본 적이 없는 나는 앞으로의 일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안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53세’가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53세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1년이 되는 해로 그쯤이면 결과를 기대할만하다고 생각했다. 제 풀에 지쳐 글을 쓰지 않게 될까 봐, 그게 가장 두려웠는데 적어도 53세까지는 글을 계속 쓴다는 거니까. 

    

“엄마는 책 한 두 권 내고 그만두는 게 제일 걱정이었어. 할머니가 본 사주에 따르면 계속 글을 쓴다는 거니까 그걸로 충분해.”

초밥이한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초밥이는 “오, 멋있는데”하면서 어깨를 툭 칠 것처럼 말했다.    

 

동창분은 내가 자아가 강해서 스스로에게도 해로울 수 있으니 종교를 가지거나 봉사를 권했다고 했다.  그 말을 내 나름으로 해석해봤다. 자아가 강한, 자아정체성이 강한, 즉 일생이 질풍노도의 사춘기인 사람이 실제 능력이 기대한 수준이 되지 못하면 남에게 괴팍하게 대하고 황폐한 삶을 사는 게 아닐까. 자식이나 배우자를 통해 성취욕구를 채우려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방식을 택한다면 오기와 단절이 생기지 않을까.


노력의 방향을 자신으로 향할 때, 미세하지만 성장하는 기분을 느낄 때, 스스로도 단단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관대해질 수 있다는 걸 나도 어렴풋이 알아가는 중이다.  

 

“과외가 직업이 되겠나. 공인중개사 자격증 한번 따 봐라.”

이번에는 아빠다.

“아빠, 엄마한테 얘기 못 들었어요? 십 년 뒤에 내가 인세로 살지도 몰라요.”

“그기 그래 쉽나, 판검사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요새는 책 보다 영화나 드라마가 인기라카던데.”     


“아빠, 상을 받는 감독들도 단편 영화를 만들고, 연극 대본도 쓰고, 스텝으로 일하면서 그동안 실패로 보일 수 있는 시간을 보내왔을 거예요. 하지만 좋아하니까 계속할 수 있었을 거예요. 나도 전에는 몰랐는데 적성에 맞는 일은 보상이 없어도 할 수 있더라고요.”     


이제야 아빠와 이런 대화를 하게 되다니, 늦게라도 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학원을 폐업하겠다고 했을 때 아빠가 반대해서 그냥 몰래 했다. 집에서 과외하면서 학원에 나가는 척했다. 그 와중에 아빠가 한 기억나는 말이 있었다.


“내가 가공한 물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는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이 있다. 일의 끝을 보겠다는 마음이 너는 없냐?”     


아빠는 오빠와 나에게 덥고 추운 공장 말고 공부해서 편한 일을 하라고만 했는데, 이렇게 당당한 마음이 있었다니 다행이었다. 동시에 예전에 이런 말을 더 많이 해줬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제 정답이 없는 길을 가는 건 부모나 자녀나 마찬가지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다른 분야, 다른 환경이라도 일을 하는데, 살아가는데 근간이 되는 신념과 태도가 있다. 경험을 나누다 보면 삶에 필요한 바탕을 채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학생이기도 했고 선생님이기도 했다. 딸이기도 했고 엄마이기도 하다. 과거의 시간과 내 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앞으로의 답을 찾는 길일지 모른다. 몰랐던 부모의 진심을 마주하고 실수를 껴안을 때, 사방이 트인 곳으로 나온 기분이 든다.


“아빠, 내가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먹고사는데 필요한 일도 열심히 할게요. 아빠가 옆에 있어서 든든해요, 사랑해요.”

작게 한숨 쉬는 것 같았지만, 아빠는 내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사주에 남자가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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