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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을의 삶, 내가 처한 현실

by 김준정

죽을 얌전하게 끓여놓았더니 초밥이가 숟가락으로 뒤적이며 말했다.


“전복 없어?”

“무슨 어르신이냐? 지샘한테 죽 갖다주고 올게.”


나갔다 들어오니 그릇이 거의 비워져 있었다.

“방학에 토론할 때 게스트 초대하면 어때? 지우, 현민, 옆집 모범생 중에서. 어때?”

“엄마."

"왜?"
"아침이잖아.”
“아침에 말 시키지 말라고?”

초밥이는 고개를 한번 까딱하고 눈썹을 그리는데 집중했다. 그때 나는 초밥이가 남긴 죽을 먹고 있었다.


완벽한 을의 삶, 이것이 내가 처한 현실이다. 지나온 세월 중에 이렇게 눈치 보고 살았던 때가 있었나 싶다. 다음은 일요일에 나눈 카톡이다.


“엄마 산에 갔어?”
“맞아.”

“언제 와?”
“안가.”
“지유랑 같이 자도 돼?”
“돼.”

“고마워.”


초밥이는 아빠한테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집에 왔는데 나를 보고 정색을 했다.


“안 온다며!”
“장난이지. 믿었어?”
“왜 그런 장난을 치고 그래?”


그러더니 휙 나가버렸다. 친구를 집에 못 오게 한 것도 아니고, 내 집에 들어온 게 잘못이라는 건가.




"너는 가능한 모든 걸 허용하는 엄마였어."

동동맘이 나에게 한 말이다. 요즘 같아서는 내가 해온 방식이 맞나 확신이 들지 않는다.


친구 같은 부모가 자식을 불안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부모가 권위가 있어야 아이가 안정감을 가진다는 말에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부지런한 친구에게 좋은 영향을 받는 것처럼, 만만한 엄마지만 자기 일과 삶에 최선을 다하면 자식도 믿음을 갖지 않을까? 안정감은 권위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태도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나는 딸이 우리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사나, 하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열심히'와 '재미있게'가 다른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다.


“나도 브로콜리 좋아해. 빼지 마.”


나는 볶음밥이나 스파게티에 브로콜리, 양배추 같은 야채를 과하게 넣는다. 그건 내가 탄수화물을 적게 먹기 위해서고 초밥이한테 강요하지 않았다. 초밥이는 얼마 전까지 브로콜리를 싫어했는데 그새 바뀌었나 보다.


초밥이가 꼬꼬마 시절부터 나는 그날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었다. 내가 먹는 걸 보아온 초밥이는 점차 하얀색에서 빨간색으로, 다양한 야채로 먹는 영역을 넓혀갔다. 나는 요리가 의무가 되는 것이 싫었고,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초밥이가 친구들한테 집에 라면이 없다고 했더니 깜짝 놀라더라고 했다. 이제 초밥이는 내가 라면 사다 놓을까, 물으면 살찐다며 싫다고 한다. 횟수가 문제인데 평소에 집밥을 먹으니까 초밥이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 와서 먹으면 나는 그런가 보다 한다.


예전에 초밥이는 아빠와 함께 남탕에 갔고, 초밥이가 신체 한 부분을 뚫어지게 보기 시작한 다섯 살부터 나와 여탕에 갔다. 나는 나의 행복이 중요한 이기적인 엄마였다. 나를 중심에 놓고, 같이 좋은 방법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초밥이가 깻잎을 보고 “이거 이마에 붙이고 사진 찍었던 거 생각난다” 하더니, 엄마한테 보여줄 게 있다며 사촌언니한테 받은 아동 시절 사진을 보여줬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외쳤다.


“꼬맹아, 나 무서운 언니하고 살고 있어. 어서 돌아와.”

KakaoTalk_20221214_170857680.jpg 얌전하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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