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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29. 2022

엄마하고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나만 잘하자는 소중한 깨달음

집으로 발신인 없는 택배가 연달아 왔다. 수신인은 초밥. 첫 번째 김자반, 두 번째 틴트, 세 번째는 팔쿠션이었다.     


“뭐냐?”
“몰라. 괜찮다고 했는데도 보낸대. 돈 쓸데가 없대.”

한 남학우가 초밥이한테 보내는 선물이었다.

“무슨 상속자냐?”     


팔쿠션은 학교에서 편하게 자라고 보냈단다. 수학의 정석을 베고 잤던 어미가 말했다.

“걔가 여자라고 해봐. 부담스러워서 안 받겠지? 남자가 여자한테 돈으로 능력을 과시하는 과거 문화를 네가 답습한 거야.”

“엄마한테 이제 말 안 해.”     


<안나 카레니나>를 내가 십 대, 이십 대에 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회한에 젖어 초밥이한테 권했다가 간단하게 거절당했다. 이미 예상했기 때문에 상처는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보여주겠어. 이것이 바로 나의 지난 연애를 글로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쓰다 보니 제대로 몰입되어서 나는 딸한테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 없는 인간이다, 나만 잘하자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다혈질에 오기에 찬 철부지에다 확대해석, 자기 연민을 패키지로 장착한 사람을 만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게 기적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가부장 문화에 감사함을 느꼈다.     


“피코 하지 마.”

“무슨 뜻이야?”
“피해자 코스프레.”   
  


화내지 말고 말해, 왜곡하지 말라는 뜻의 ‘피코’, 엄마한테 요구사항을 말하라고 했더니 초밥이가 한 말이다. 너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전령이더냐.     



초밥이가 전교회장 선거에 나갔다.     


“피켓 같은 거 안 만들어?”

“어차피 내가 돼.”

    

그래놓고 떨어졌다. 초밥이를 학교에 내려주고, 선거운동 도와주는 친구들한테 주려고 편의점에서 따듯한 초콜릿우유를 사 왔더니 다른 후보와 선거인단은 목청껏 구호를 외치고 있는데 초밥이 팀만 없었다. 그 얘기를 했을 때도 초밥이는 “어차피 내가 돼”그랬다.     


“휴대폰으로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있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하잖아. 하루 30분이라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시간이 있어? 정신이 분산되어서 그 어떤 것에도 집중 못하잖아. 네가 요즘 그래. 영혼이 없다고.”   

  

글로 써서 그렇지, 세상의 종말이 올 것처럼 말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변신로봇 같은 엄마.

     

곧바로 후회했다. 집이라도 나가면 어쩌지, 건강한 것만 해도 감사한데 내가 무슨 욕심을 부리는 거지. 나야말로 그 어떤 것에도 집중할 수 없어서 초밥이한테 문자를 보냈다.    

 

“엄마의 히스테리 때문에 네가 다칠까 봐 걱정된다. 미안하다.”     



크리스마스이브, 초밥이는 지유 집에서 잤다. 다음날 초밥이한테 톡을 했다.


“저녁은 엄마랑 먹으면 안 돼?”

“아, 엄마, 크리스마스잖아.”

“크리스마스에 엄마하고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
“아까워.”     


그렇단다. 특별한 날이 그렇듯,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도 문득 외롭고 만사 부질없어서 밖을 나갔다. 오후 5시, 나의 45살 크리스마스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눈이 쌓인 길을 걸어 은파호수공원까지 갔다 오니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살짝 땀이 나고 배가 고팠다. 인생무상도 배고픈 것 앞에서는 소용없다. 뭘 먹을까, 하는 목표의식에 대하를 사서 집에 있는 양상추, 오리엔탈 소스, 레몬을 잔뜩 뿌려서 맥주에다 먹어야지하는 계획을 세우자 침이 고였다.


산책하는 동안 만난 4개의 눈사람 사진을 초밥이한테 보내자 초밥이도 지유랑 두 시간 동안 만들었다며 토토루를 보냈다. 안 보이는 곳에서 너의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구나. 함께하지 않아도 각자의 눈사람을 보여주면 충분하지. 그렇고말고. 날씨가 춥다.

산책 중 만난 눈사람
엄마와 밥 먹는 시간을 아껴서 만든 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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