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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Feb 17. 2023

엄마는 서울대 갔어?

나와 가까워지는 결정을 하며 살아가길

초밥이가 아빠와 꽤 오랫동안 전화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치자 내가 물었다. 

    

“아빠하고 무슨 얘기했어?”
“하고 싶은 일이나 가고 싶은 대학 있냐고.”

“뭐라고 했어?”
“없다고 했어.”
“서울대 가고 싶어도 성적이 안 되는 거 이제 다 알거든. 그지?”
“엄마는 서울대 갔어? 자기도 못 갔으면서.”

“그렇지. 나는 너의 그런 기백이 좋아. 서울대에 말대꾸 학과가 있으면 바로 합격인데.”

“나 공부 못하거 아니야. 반에서 3등이야.”

“그거 알아? 발끈하는 게 공부 못한다는 증거다?”
“아빠는 절대 나 무시하는 말 안 해.”

초밥이가 벌떡 일어나서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고 싶어서 화낸 거지?”

“진짜 화났어!”     


쓰고 보니 나도 어지간히도 깐족거린다(실제로는 조금 더한다)싶지만 나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초밥이는 방학 동안 오전 11시쯤 내가 밥 먹자고 부를 때까지 잔다. 먹고 나서도 방문을 열어보면 다시 자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중 2가 된 지금까지 이어진 방학 루틴이다. 개학 일주일 전, 어미 된 자로서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어서 나는 처음으로 기상시간에 대해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정해봐.”

“10시.”

하루나 지켰나? ‘먹고 다시 자는 루틴’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나는 기로에 섰다. 딸에게 잔소리하고 신경전을 하느냐 vs 나의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느냐.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일상을 택했다. 그렇다고 아이에 대한 불안까지 버린 건 아니기 때문에 걱정과 사랑으로 깐족거리게 된 거다. 이에 굴하지 않고 초밥이도 주옥같은 말대꾸로 호응을 해줬다.




초밥이는 곧 중3이 된다. 전에는 내가 놀리면 맞아, 하고 같이 웃었는데 요즘은 발끈하는 걸로 봐서 성적, 진로에 대해 예민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라고 초밥이 진로를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군산보다 조금 큰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보낼까, 예고에서 끼를 발산해 보라고 할까, 인문학 중심 교육을 하는 대안학교에 보낼까 등등. 그러다 주산이 생각났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선생님이 주산 급수가 높은 애들을 학교에 남겨서 시킨 일이 뭐냐 하면 시험점수의 총점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렇다. 1990년대 초에는 계산기도 없고 개인정보보호법도 없었다. 선생님이 암산으로 더한 반아이들 점수를 나를 포함한 미래 주산 인재들이 주판으로 검산했다. 톡톡톡톡, 착, 고요한 교무실에 주판알 놓는 소리만 나던 오후를 떠올려보니 아무래도 나의 경험으로 아이에게 유리한 길을 알려주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오랜만에 통화한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친구의 고향은 포도가 유명한 지역으로 부모님은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다. 샤인머스캣이 일반 포도보다 수익이 세배가 되자 부모님은 포도밭 전체를 샤인머스캣 재배를 위한 시설투자를 했다. 하지만 올해 샤인머스캣 재배 농가가 늘어나는 바람에 가격이 하락해서 작년대비 삼분의 일 가격이 돼버렸다고 했다.      


빠른 속도로 정보가 공유되는 시대에 수익성이 높은 품목의 독점은 불가능하다. 개인대 개인의 경쟁이 아니라 개인과 자본을 가진 대기업과의 경쟁이기도 하다. 골목 구석구석은 물론 한적한 시골마을까지 들어선 편의점을 보면 자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시대에서 나와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사실 모른다. 구체적으로 길을 제시할 수 없는 게 맞다. 미래는 암울하기보다 내 놀이터가 펼쳐지는 거라는 만만한 마음을 아이가 갖게 하고 싶다. 하고 싶다, 할 수 있다,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고 재미있으려고 사는 거다라는 마음도 함께.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다. 이것이 바로 내가 심각하지 않게 최대한 가볍게 장난치는(깐족거리는) 이유다.  


늘 감정조절에 실패하고 내가 중요한 엄마지만, 나도 한 가지 잘하는 게 있다면 사과하기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없다. 어른이라고 실수하지 않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부모나 선생님이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는 스스로 존중받는다는 것과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내가 판단하고 헤쳐나갈 수 있다는 걸 알지 않을까.   




어쩌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초밥이와 진지한 대화를 했다. 초밥이는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자기 성적으로 택도 없다는 걸 아는 총명함도 가지고 있는 딸에게 내가 말했다.     


“공부가 기질이 아닌 사람이 노력해서 의사, 교수가 되면 행복할까? 더 행복한 길이 있지 않을까? 그만큼 노력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일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을 거야.”   

  

사실 아이는 정신과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 줄도 모른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직업을 말한 것뿐.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얻는 부산물이나 분위기에 따라가지 않고, 나와 가까워지는 결정을 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엄마한테 말대꾸할 때의 기백을 살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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