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정 Feb 22. 2023

아이에게 부끄러울 때

엄마가 잘못했을 때 가차 없이 말해줘

초밥이는 이주에 한 번 아빠를 만난다. 그날은 아빠를 만나기로 한 금요일이었다.     


“오늘 언제가?”

“아직 몰라.”

“아빠 컨디션에 달려있지? 아빠가 데리러 올지, 내일 네가 버스를 타고 갈지 말이야. 아빠가 결정하기 전까지 너는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잖아, 안 그래?”
“아침부터 험담하기 싫어. 그게 누구라도.”     


아... 나 왜 이러지...     


부모의 결별자체가 자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기보다 전배우자에 대한 감정을 자식을 통해 해소, 위로를 받고자 하는 어리석은 시도가 자식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다.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자식의 생김새나 행동이 전배우자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초밥이가 구둣주걱을 사용해서 운동화를 신거나 가위로 봉투를 자르는 걸 보고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걸 실감했다. 그건 초밥이 아버님도 다르지 않았는지 초밥이가 웃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엄마와 닮았다”라고 정색했다는 사실이 내 귀에 들어왔다.     


엄마, 아빠가 자기에게 하는 반응을 보고 아이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자기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에 더해 부모의 감정까지 감당해야 하다니.     


오랜 시간 결정권 없이 무력한 상태로 있었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어. 그때 너는 어렸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놀자고만 했지. 나는 복잡한 마음을 숨겨야 했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있던 날이 많았고, 그 설움이 가시지 않았나 봐.      


쏟아지는 햇살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순간이자 엄마한테는 가장 외롭고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했던 시간이었어. 그때가 엄마가 어른이 되는 순간이었던 것 같아. 무섭지만 혼자라도 길을 가보자, 내 손을 잡고 있던 너를 보면서 다짐했던 것 같아. 그대로 주저앉았더라면 엄마라는 사람은 없어졌을 거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깊은 절망의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웅크리고 살았겠지.     


지금의 엄마라면 어떻게든 아빠와 협상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커다란 벽 앞에 선 것처럼 막막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꼈어. 단단한 벽,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강한 벽이라서 결혼했는데 그 벽에 내가 갇힐지는 몰랐어.      


엄마가 중학생이었을 때 이런 일이 있었어. 엄마가 가수 신해철 콘서트를 가겠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야간업소 디너쇼로 생각하고 화를 내면서 못 가게 했어.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 울기만 하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 이제와 생각하면 할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아도 나는 갈 거라고 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 말 때문에 할아버지가 더 화를 내고 콘서트는커녕 외출금지 같은 벌을 받았다고 해도 벽을 깨는 시도를 한 경험은 남았을 테니까.     


한 번도 할아버지를 꺾어보지 못했던 것이 내 안에 벽을 만들었던 것 같아. 그렇게 대단한 벽이 아니었을지 모르는데. 벽을 두껍게 만든 건 엄마 자신일지 몰라. 너는 아빠와 엄마에게 순종하기보다 반발하고 네 의견을 관철시키기 바라. 당장은 아무런 소득 없이 상처가 남는다 해도 말이야.   

  

초밥이가 아빠를 만나고 와서 말했다.     


“아빠가 나한테 공부하는 동기를 줘야겠다면서 전교 10등 안에 들면 5만 원을 주겠다는 거야. 10등 안에 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내가 아무 말도 안 했더니 그럼 한 등수라도 올리면 5만 원 준다고 했어.”


“아빠가 너한테만은 타협을 하네. 그만큼 사랑하고 소중하다는 거겠지. 아빠가 너한테 져주는 거 엄마는 알 것 같은데? 좋은 아빠라서 다행이다.”     


가끔은 그거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남자와 어떻게 결혼하고 애를 낳았나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내 인생에 가장 소중한 존재를 만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 주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영리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친구가 생겼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침에 아빠 얘기한 거 미안해. 어린애처럼 너한테 위로받고 싶었나 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내가 한심한 짓을 한 것 같다. 너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에 엄마가 책임감을 가지지는 못할망정 말이야. 반성하고 있어. 미안해. 다음에 또 엄마가 잘못하면 가차 없이 말해줘.”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는 서울대 갔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